나의 인도 여행기 I
나마스떼!
안내를 포함한 39명의 서울대 선후배 동문들이 3월10일 델리 비행장에서 만났다. 여행사 사장 Joanne Han의 권유대로 서울에서 30 여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는지 서울서부터는 8 시간도 않되는 비교적 간단한 비행이었다. 인도라는 곳은 다섯 명의 장님이 코끼리의 각기 다른 부분을 만져보고 다섯 가지의 다른 표현을 하듯이 어디에 어떻게 중점을 두고 말하느냐에 따라 다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호텔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후 거리로 나가기전 한국말을 유창히하는 안내인 서티아(Satya Prakash)박사의 경고는 힌두교의 전설에 의한 악이 망하고 선이 승리한 큰 명절날이라(Holy축제) 새옷으로 단장들을 하고 얼굴에도 여러가지 색을 칠하는데 아무에게나 칠하는것이 풍습이며 오후 3시나 4시 경에는 끝날 것이라했다. 인도에는 109가지 이상의 종교가 있으며 85% 이상이 힌두교인이고 신들 중 가장 높고 힘이 있는 시아신(Shiva)은 어디를 갈때면 소를타고 다녔기 때문에 소는 신성한 동물로 추앙을 받고있고, 윤회설을 믿기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힘들고 가난하더라도 좋은일하고 착하게살면 다음 생에서는 보다나은 삶을 누릴수 있다고 믿으므로 늘 그들의 행복 지수는 높고 별 불평과 불만 없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인도에는 29개의 주와 17개의 다른 언어가 있으며 각 주마다 독립성을 가졌지만 특히 놀라웠던 것은 주 안에 아직도 작은 왕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도의 문맹률은 40%가 넘어 선거때는 출마인 이름 옆에 기호 외에도 자전거나 코끼리 등의 다른 표시가 있어야 되며 20여년 전 6억 5천만의 인구가 지금은 13억이 넘으니 앞으로 인구가 배로 늘어 날 때는 어떻게 될런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개인 소득은 일년에 $ 400미만으로 현대 자동차의 노동자가 한달에 $4000 을 받는다면 인도의 일꾼들은 $40을 버는 현실이고, 정치는 몹시 부패해서 국민들의 생활을 향상 시킬 마음은 전연 없고, 자기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며 그들의 전력을 기우린단다. 인도인들을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발을 묶어 놓는 캐스트제도, 브라만, 카트리시아,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의 철저한 4 계급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수상이 가장 말단 수드라 출신 여자라는 것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인도에서는 최고로 손꼽히는 서박사의 모교인 네루 대학 캠퍼스를 구경할수 있었는데 입학율은 천대 일이고, 합격만 되면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한 사람이 의과 대학을 졸업하려면 일억 오천 만원의 막대한 국민의 세금이 들어 가건만, 그들은 일전도 내지않고 공부를하며 졸업 후에는 모두 외국으로 간다니 캐스트제도 외에도 이 가난한 사회의 병폐를 이미 느낄수 있었다.
한번에 일만 명이 기도할수 있다는 자마마스지드 시크 (Sikh)교 사원으로 갔다. 남자들은 터반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종교로 물론 신발을 벗고 (몇일 후에 느꼈지만 그 더러운 길을 걸어다니던 신발을 성스러운 곳에 들어갈때 벗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진한 주황색의 보자기로 머리를 가리우고 들어갔는데 넓은사원 안에는 여러명의 신도들과 두개의 침대가 노란(금 메끼?)캐누피로 드리워져 있었다. 정장을 한 남자하나가 침대앞에 앉아서 하얀털로 만든 부채질을하고 있었고, 그 밑에는 너댓명의 여자들이 아름다운 그들의 전통옷 사리를입고 앉아서 큰노래 소리로 챈팅을 하고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여자들은 사리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성서를 모시는 침대였고 밤이되면 구석에 있는 침대로 조용히 쉬도록 옮겨 놓는다고 했다. 성전을 나오자 커다란 밥 솟에서 (쌀을 굵게 타갠 것 같은) 작은 주먹 밥 하나 씩을 받아 먹는데 나도 어떤 분이 가져 온 밥을 조금 떼어서 먹었다. 우리의 밥 같았지만 약간 단 맛이 있었다.
그 후 파란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공원 같은 곳으로 갔는데 인도의 무저항 독립 투쟁가, 인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권 옹호 주의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를 화장했던 곳으로 힌두교에서 화장을 하려면 첫 째 조건이 물 가까히 있는 곳이어야 한단다.
다시 버스는 우리를 인도문에 내려 주었고 그 곳은 영국인이 만든 인도인을 위한 위령탑으로 많은 사람들이 잔디 밭에서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거의 250년이나 영국의 식민지로 착취를 당했으나 영국인에 대한 쓰라린 감정은 없고 그들이 두 가지 잘한 일이 있다면 4000개가 넘는 작은 나라들을 통일시켰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인도에 가는데 4000개의 비자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는 그 큰 나라에 철도를 놓아서 나라들를 연결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델리에는 붉은 벽돌의 낮고 긴 건물들이 즐비했는데 모두 정부기관들이었고 우리들은 버스 차창으로 내다보는 것으로 그쳤다.
김 명자 14212 Eagle Run Dr.,Omaha, NE 68164 jtkohr@ms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