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버림이다
-이스탄불로 향하며
김희봉(수필가, 샌프란시스코 거주)
여행은 버림이다. 버리기 위해 떠나라는 말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지금껏 부산스레 떠났던 내게 누군가 여행벽두에 들려준 이 한마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길을 가면서 때묻은 나를 버리라는 말이다. 삶에 찌들어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아온 나를 터어키의 황토길을 지나며 훨훨 날려보내라는 것이다. 세상 끝에 사는 낯선 인종들과 생경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부셔 버리라는 것이다. 봇짐을 내려놓고 오랜 역사가 서린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모퉁이 벤취에 앉아 차 향내를 맡는 여유를 부려보란 말이다. 조급함을 버리고 시간이 잠시 선 모습을 국외자(局外者)처럼 지켜보란 뜻이다.
예전의 여행에서 나는 떠나기 전부터 피곤하였다. 가장 염가에 가장 많은 곳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였다. 여행코스도 가급적 많은 곳을 돌아야하고, 역사책도 서둘러 읽고 외우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떠났다. 그러나 여행 끝에는 늘 덜 채워진 듯한 미진함에 더 큰 피로가 몰려왔다.
이젠 얻으려는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닦은 창처럼 눈도 맑아진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함께 흘러가리라고 마음먹는다. 설사 내가 역사 한 조각을 지나쳤다해도 그리 대수가 아니다. 오히려 옛 지하도시, 카파도키아에서 허물어진 농가의 지붕을 고치는 노부부를 보며, 이스탄불 그랜드 바쟈 거리의 남루한 악사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기막힐 듯한 사연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상상력임을 깨닫게 된다. 상상하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이번 2주간의 터어키 여행을 준비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팀의 리더인 최정남 선생님은 역사의 테마를 따라 여유를 누리는 여행을 제안하였다.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가처럼 떠나보자는 것이었다. 쫓기고 들뜬 아마추어 보따리 행색이 아니라 자유로운 보헤미안처럼, 겸허한 순례자들처럼 옛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밟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스의 조앤 한을 인솔자로 만났다. 그녀는 늘 우리들의 뒤에 서서 여행가족들을 이끌었다. 길가에 흩어진 오스만 터키의 유적 앞에 우리와 한 뿌리인 돌궐족의 흔적을 찾는 여행가를 끈기있게 기다려주고, 전 국민의 추앙을 받는 터키의 국부, 케말파샤의 장엄한 기념관에선 흘대받는 우리들의 지도자 박정희를 생각하며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6.25참전 기념공원에선 동양의 빈한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꽃다운 터키청년들의 묘비명을 쓸며 고맙고 애처로와 함께 속으로 울었다.
이번 터어키로 가는 실크로드 여행은 미 동부와 중부팀을 합쳐 모두 37명의 장년 부부들이 모인 캐러밴급이었다. 그런데 대개 초면임에도 오래 사귄 이웃들처럼 친근하고 여행 매너들이 몸에 배어 매사에 일사불란했다. 게다가 한분 한분 각 분야에서 평생 일가를 이룬 전문가들이었는데도 한결같이 겸손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배려해 주는 어른들이었다.
그 중에 한 분이 말했다. “역마살이 낀 제가 세계 방방곡곡 다녔던 곳들 중에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사람들은 물어봅니다. 저는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지요. 결코 세상절경이 아닙니다. 제가 젊은 날,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경포대 백사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우리의 사연이 담긴 곳입니다.”
건축을 전공한 또 한 어른이 말했다. “ 2주간 우리 나라 명승지를 낱낱이 돌아본 한 프랑스 화가에게 어디가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신도시 일산을 꼽았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성냥갑 같은 아파트 군들을 바라보면서 4차원의 세계를 보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행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접고 가장 그 나라다운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다. 집시처럼 떠나자. 여행은 감성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내 사연을 심는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사람들의 사정에 귀 기우려 보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유유하게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4차원의 세계와 맞닥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 선입견과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본전을 뽑으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여행은 내가 있어야할 곳에 결코 없는 것이다. (201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김희봉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