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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카파도키아, 콘야, 파묵칼레: 자연의 짓궂음과 인간의 발버둥2009-09-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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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위 - 가파도키아 열기구-  열기구를 타고 바람부는 방향으로 날아가며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가암 괴석의 가파도키아를 내려도 볼수 있다.
아래 - 이슬람의 한 종파인 메블라나 박물관과 우주가 돌고 있는 것도 함께 맞추어 빙글 빙글 돌면서 사랑안에서 온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 세마의식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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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곳은 카파도키아(Capadocia) 였는데 이것은 그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였다.  이 곳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헷족속의 본거지 이기도 하다.  카파도키아는 정말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작품들과 인간들이 남겨놓은 흔적들로 여기저기 기기묘묘한 볼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이곳은 외계인의 도시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영화 촬영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모래로 된 바위 위에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덮였던 것을 긴 세월동안 비 바람이 깍아내어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이것들을 글로 표현할 길은 없다.  더러는 서로를 의식하며 웃을 수 밖에 없는 짓궂은 모양들도 많이 있었다.  
  여하튼 자연의 작품들과 그 규묘는 우리 모두의 기대를 초월했었다.  특별히 궤레메(Gőreme)라는 곳의 기암 벽면에는 여러모양으로 굴을 파서 여러 용도로 쓰였던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성경(행2:9)에 따르면 그 때에 이미 카파도키아 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로 시작하여 이곳은 초대교인들과 그 후세대의 사람들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여러가지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다.  동굴속에 예배처, 식당, 부엌시설 등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믿음생활이 지극히 고달프고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특별히 궤레메는 AD300부터 AD1200까지 수도원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의 풍경은 가까운곳을 보나 먼곳을 보나 심지어는 지평선을 바라보아도 신기하고 신비로워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찾은곳이 데린큐유(Derinkuyu) 지하도시였다.  대략 지하 8층으로 건설된 이 지하도시 안에는 통풍장치, 우물, 곡식창고, 집회장소, 변소, 술과 기름짜는 곳, 교회 등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이 지하도시는 그 당시의 지상의 주택들과 일일히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보통때는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일단 유사시에 지하로 내려가서 안전이 보장될때까지 견디어 냈던 것 같다.  모든 적군이 철수할때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 알려진 지하도시만 해도 40개가 넘고, 동굴안의 인구가 삼만명이 넘었다니까 대단한 규모였다.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정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주민들이 지하도시로 피난했던 가장 큰 이유는 종교에 대한 핍박을 피하기 위함이였고, 그 당시의 평균수명이 35세를 넘지 못하였다니 이들의 힘들었던 생활, 정말로 쫒기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비해 오늘의 신앙인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원할것이 없어야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기구(풍선)을 타고 높이 올라가서 넓은 지역의 경관을 한눈에 보는것과 둘째는 동굴식당을 경험하는것이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더운 공기를 불어 넣어서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기구는 바깥 공기가 가장 무거울 때, 즉 이른 새벽에 가장 잘 뜰수있다.  그래서 기구를 타기 위해서는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만 경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 두가지 이유로 우리는 이 특수한 경험을 포기했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면 잊지못할 좋은 경험을 얻었을 것 이라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돌산의 절벽을 파서 만들어 놓은 동굴식당은 깨끗히 잘 꾸며 놓았고 음식도 풍부하고 깨끗한 그 지방음식으로 먹을만 했다.  동굴 안에서의 식사도중에는 음악(live music)으로 분위기를 띄어주어서 즐기면서 많이 먹게 되는데, 주의 해야 할 점은 함께 들떠서 옷가지나 무엇을 놓고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곳 또한 색다른 경험이였고 아직까지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로 가는길에 콘야라는 곳을 들러서 지나가게 되었다.  이 곳은 이슬람의 한 종파인 메블라나(Mevlana)의 박물관이 있는 곳인데 놀랍게도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의 숫자에 놀랐다고한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메블라나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였다.  치마를 입고 고깔 모자를 쓰고 오른손은 높이들고 왼손은 낮게들고 빙글빙글 돌다가 더 빨리 돌고 아주 빨리 돌아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 말은 도대체 농담인지 진담인지 사람을 놀리는 것 인지 구별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였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보지는 않았으니까 누구도 만난일은 없지만 만나기전에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만은 확실했다.  
  박물관안에는 엄숙한 종교의식에 쓰였었던 많은것들이 진열되고 있었고 특기할 것은 이들의 매장 방식이 특별하다는 것 이다.  이 종파의 창시자 Mevlana Celaleddin Rumi는 13세기에 현대의 타지키스탄에서 출생하였고 이슬람의 학자 이면서 철학자로 활동하였었다.  그는 자기의 생각들을 시형태로 써서 (성경의 많은 부분도 시형태로 쓰인것처럼) 후세들에게 남겼고 이것이 메블라나 종파의 근간이 된 것이였다.  이 종파에서 빙글빙글 도는 의식은 sema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이 주는 의미는 사랑 안에서 온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것, 우주(universe)가 돌고 있는것과 함께 맞추어 간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한다.
창시자 Rumi가 남겨놓은 말 중에 몇가지만 예로 들자면  
“사랑이란 진리(Truth/진실)를 발견하는 것이다, 오직 사랑으로만 신께 다가갈 수 있다, 궁극적인 사랑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경지에 다달을 때에 그는 비로소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 이다,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다.” 등이다.  그는 틀림없이 시대에 앞서가던 철학자 였다.
이제는 메블라나에 대한 나의 인식은 약간 달라졌을지라도 이런 형태의 철학이 종교의 모양을 지니고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콘야를 떠나 파묵칼레로 이동하면서 버스 창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던 평야, 평야 다음에 또 평야, 온들을 덮어버리던 노란꼿의 평야, 그리고 다시 또 노란꽃의 평야, 우리는 5시간동안 평야만 달리는 것 같았다.  이런 풍경은 내가 조국(한국)을 생각하면서 부러워하지 아니할수 없는 그림이였다.

   우리가 묵어가던 호텔들은 매번 음식이 좋았는데 그 지방의 음식을 맛보는것도 여행이 가져다 줄수 있는 기쁨이고 특권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였다.  마침 이 고장에서 자랑하는 음식으로는 건강하고 살찐양들의 젖으로 만들어내는 요구르트(yogurt)가 있으니 틀림없이 맛보라는 충고가 안내원(guide)으로부터 있었다.  그 아침 호텔 음식으로는 요구르트뿐이 아니고 생벌꿀이 판(screen)채로 나왔다.  이것들을 누가 아니 맛볼수 있었으랴.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나는 미국에서 여러해를 살았어도 우유를 마시지 아니한다.  뻔한 이유 때문이다.  먼 길을 가는동안 나는 여러 번 “삐삐까까(급하다는표시)”를 해야했다.  터키 주유소들의 화장실의 특징은 약간의 돈을 받는것과 발씻는 시설이 있는것과 변기에 비데(bidet)까지 달려있는곳이 많다는 것이다.

  한번은 기다릴 수 없을만큼 급한사람이 있어서 농촌의 낟가리 곁에 설치된 임시변소를 발견하고 정차했던 일이 있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아이를 안은채 걸어나왔다.  돈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추측이였다.  안내원이 알아보고나서 하는말, 자기집 앞에 많은 손님이 오셨으니 모두에게 차(tea)를 대접하고 싶단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미풍양속 을 저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저들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훈훈 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있었다.

   콘야를 지나 도착한 곳 파묵칼레(Pamukkale)라는 이름은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이다.  목화성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서 흘러 나오는 온천 물을 통하여 섞여 나온 석회분이 오랜 기간 침전축적 되면서 산 중턱의 꽤 넓은 부분을 흰색으로 덮어 마치 목화송이로 덮어버린 성 같다 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묘한 모양들이 많고 멀리에서 보면 장관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부근은 실제로 질 좋은 목화가 생산된다고도 한다.  이 곳은 대략 남산의 4분의 1정도 크기의 고지인데 그 위에는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가 로마 통치 기간 중에는 확장되고 번성하면서 히에라볼리라고 불리우면서 이어서 성경 속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골4: 13)  그 당시 지배층이었던 로마인들의 사치스러웠던 삶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잔재 만으로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빌립 집사의 순교지가 이곳 어디에 있다.  
성경 속에서 희에라볼리와 함께 나오는 이름이 라오디게아 (골 4:13, 15, 16, 계 3:14-23)이다.  라오디게아는 파묵칼레에서 대략 10km 남쪽에 위치해 있지만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들르지 아니했다.  성경에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4-22)” 라는 말씀이 나온다.  성경은 물론 사람들의 신앙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말씀에 나오는 더운물의 근원이 파묵칼레의 온천 물을 뜻하고 있었다면 이 물은 어차피 덥건 차건 간에 그냥 마실 수는 없는 물이다.  석회질이 너무나 많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석회질이 많이 섞인 이 온천 물이 피부와 몸에 좋다고 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야외에 개방되어 흐르고 있는 온천 물은 자연히 관광객의 발길에 의하여 오염되어 흐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는 오염되지 아니한 온천 물을 따로 정해진 몇 호텔에만 공급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다행히 그런 곳에 묵도록 되어 있었다.  파묵칼레의 더운 온천 물로 채워진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피곤한 몸을 풀며 즐기던 시간은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신정윤
미 토목학회 회원, PE- 토목/구조 전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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