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ky Kang의 북스페인 여행기

Becky Kang | 7/17/2014

 I.    Barcelona

나는 항상 Barcelona 에 다시 가고 싶었다.   내 머리속에 항상 떠나지않고 있던 Las Ramblas 거리 3년전 우리가 갔을때 그 거리는 너무나 풍성해보였다.  프라타나스가 가운데 있고 한쪽으로는 Isabel 여왕을 알현하던 Columbus 의 동상이 있고 또 다른 거리의 끝엔 지중해가 보이고 그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처져있었고 Bouqueria market 에선 fresh 한 생선을 사다 내 스타일의 빠예야를 한번 해 보았으면 온갖 야채를 볶고 남은 밥에다 여러가지 해물을 다 넣고 wine beef broth 를 부어주고 아마도 노란색의 스페인 향신료도 필요하겠지  또 무얼 넣나? 한번 요리책을 들여다봐야하는데 그렇게 시작한 Barcelona 여행이었다.   

그 옛날 페르니카가 무역을 관장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갖고 있던 카르타고의 밑에 있었던 이 도시 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게 승리를 빼앗기고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아버지는 바세로나로 와서 총독을 지냈다.  어린 한니발은 이곳에서 자라면서 어렷을적 신에게 로마를 타도하겠다고 맹세를 했다니 그래서 겨울에 알프스를 넘는 그런 기습작전에 성공한게 아닐가?  두어번의 포에니 전쟁후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의 대승으로 카르타고는 없어져버리고 로마는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에스파냐라고 부르던게 어원이 되었다.  그 에스파냐, 4개의 언어를 갖고 있는 그중 하나인 카타로냐어를 쓰는 카타로냐주의 주도인 이곳 이젠 독립을 하겠다고 하지만글쎄 어떻게 될가?

 Barcelona하면 떠오르는게 Antoni Gaudi Sagrada Familia 성당 1882년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성당을 세우고자 시작해서 그의 사망 100년에 맞추어 2026에 완공하기로 한  이 성당 Gaudi 는 주물로 그릇을 만드는 공장을 갖고 있는 아버지밑에서 자랐다.  평면이 입체가 되는것을 항상 보고 자란 그는 건축학에 도전했고 직선보다는 곡선을 사용하고 공간 미술의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공화주의자고 연금술에 심취했지만, 이 가족성당을 시작하면서 수도승같은 생활에 모든 자산을 극빈자병원에 기증하면서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설립에 전념했다.  1926년 그렇게 40여년을 오로지 성당건립에만 몰두하시던 그분이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항상 허술하게 온몸이 회벽투성이던 그 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도 사무실에 일하러 나오시지않는 그를 찾아서 헤메다 극빈자병원, 그가 온 재산을 기증한 그곳에서 그냥 방치된 그 분을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Gaudi 는 그렇게 일생을 마감할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irony 한가?  아마도 그날 큰 별이 하나 Barcelona 상공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그는 그 가족성당을 예수님의 탄생, 수난, 영광의 문을 주제로 건축했고 많은 성서의 이야기를 형상화한것은 아마도 예전 글을 읽지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표현한 다른 중세 카돌릭 교회와 같은 맥락이 아닐가? 그는 결국 모든것은 자연적이어야 한다는 주창에 따라 벌집모양의 문들, 도마뱀모형의, 달팽이 모양의 층계 꽃잎모양, 보리줄기모형으로 꼭대기장식등을 표현했으며 더욱이 그 안에 들어갔을때 modern 하면서도 마치 tree 같은 모양의 기둥으로 우리를 아늑한 숲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을 준것은 아마도 우리가 언젠가 돌아갈 자연이기에 그런 자연적인것에 느끼는 편안함이 아닐가?  또한 천정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를 넣었고 그 명쾌하고 시원스러운,  또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stained glass window .  온갖 color 를 계절에 따라 넣으면서 우리 자신을 햇빛이 찬란한 숲속에서 마치 사 계절을 볼수있게 해주는것같은  사실 나는  그 안에 가만이 앉아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한없이 가만이 앉아 있고만 싶었다. 그 분의 그 정열, 창의력, 집념에 존경심과 함께 고마움, 감동스러운 마음을 그렇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정감어린 Guell Prak 예전 그의 후원자였던 Guell 백작의 요청으로 시작한 은퇴자들을 위해 시작한 주택 project 은 실패하고 오로지 3 , Guell, Gaudi 그리고 관리자, 만 건설되었고  Guell 의 사후에 후손들에 의해 Barcelona 시에 기증되었다.   아주 자연적으로 보이는 고대동굴 아치양식의 조형물, palm tree와 온갖 식물들로 가득한 자연을 구현하는 그의 공원, 나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것같이 느껴지는 그 형형색색의 타일 조각의  모자이크,  곡선으로 한없이  길게 늘어진 의자에 앉아서 그 헨젤과 그레텔이 갔던 동화속의 과자의 집 마술사의 모자가 마치 꼭대기에 달린것같은 Gaudi의 집을 그리고 한없이 펼쳐진 지중해의 바다를 그냥 내려다만 보고 싶었다.  돌계단 아래론 빗물을 받아 이용한 반짝이는 타일로 만든 도마뱀 분수가 우리를 반겨주고 모자이크들은 다 부서진 타일로 recycle 했다니, 그 분의 성격을, 철학을 알수있을것 같았다.  우리가 갔을때 그 구엘공원은 전과 달리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나는 문득 Gaudi 그분 생각이 났다.  그분은 어떤 생각을 하실가? Sagrada Familia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건축하셨다면 이 공원도 무료입장을 원하시지는 않으셨을가? 갑자기 Oslo 에서 본 Bigeland조각공원, 그는 시민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말고  24시간 open 해서 free 로 볼수 있게 하라고 했다던  그리고 아직도 지켜지고 있던

다음날 아침 아주 일찌기 우린 Salvador Dali museum 을 향해서 떠났다.  불란서 가까이 있는 그의 고향, Figueres 그림에 문외한인 나는 항상 그림이란것은 그냥 보고 좋다는 느낌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impressionist 들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몰라도.  그의 그림이나 조각은 내게는 마치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정신병동의 이야기 같다. 왜 그는 아름다운 Venus 의 가슴을 절단해 놓는가?  어느 비평가의 얘기가 추박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제서야 마음에 들어온다.  Dali 의 등장으로 의식의 창문이 최초로 활짝 열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덫에 미끄러져 거꾸로 매달린 느낌을 받을것이다  그의 조각과 그림전시를 끝내고 간 Jewel 박물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보석을 아주 아름답게 조각했고 또 동시에 재미있고 whimsical 한 느낌을 주도록 한것을 보면서 아! 내가 Dali 의 보석을 구경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모두 시에스타중이다. 스페인서는 국민스포츠 시간이랜다.  밖은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다니고 버스안은 조용하다.  Dali 의 그림을 보고 떠난 내 마음속엔 그의 독창적인 생각, 상식을 넘어서는 초 현실적인 그림의 방향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애쓴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있는거지 다들 나름대로 한 세상을 살지만 제각기 다른 방향이니까.  마치 여러 종류의 꽃들이 길거리에 흙더미를 뒤집어쓰면서 하이웨이 길가에 피어있는 야생화. 온실에서 곱게곱게 따뜻한 햇볕속에서 피는 꽃들. 황망한 사막지대에서도 피는 작은 꽃들. 그렇게 그들의 삶도 다른데 복잡한 우리 인간들의 삶은    

지중해 연안 아름다운 해안가에 있는 seafood restaurant 에서 우린 저녁을 먹었다.  bowl 가득한 맛살을 한없이 까먹고, main dish 는 그 유명한 스페인의 빠에야였다.   해물이 가득들은 빠에야 추박사가 특별이 부탁해 우리가 좋아하는 촉촉하고 잘 익은 쌀밥에 어우러진 해물들 얼마나 모두 enjoy 했는지 그리곤 그 해안가에서 걸었다  Frank Gehry 의 타이타늄으로 된 조각은 옆에서 보면 고기형상인데 앞에서는 갑옷의 투구같았다 오늘 하루종인 Dali 의 그림에서 처음 볼때와 다시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 볼때 전혀 다른 두가지 형상을 보았는데 Gehry 의 조각앞에서도  똑같이 조롱당한 기분이다  정말 유괘한 하루였다.

이제 우린 Barcelona 를 떠난다.  Columbus 동상을 보면 항상 마음이 벅차고 동시에 Da Vinci 가 떠오른다   두사람 모두 200년후에 태어났더라면 또 세상의 인식은 어땠을가?  그렇게 1492 Columbus 는 지구는 둥글어서 곧바로 가면 발견한다던 인도대신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스페인을 제국으로 만들어주고  근대로 향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가 

 

        II.      Zaragoza

Aragon 의 수도 사라고사를 간다는것은 마치 Queen Isabella 의 부군 Ferdinand 를 만날수있을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사실 Isabel 의 나라, El Cid 의 고장인  카스티유의 수도였던 Burgos 가 가고 싶었지만 거리상 여의치않아 얼른 마음을 접었다. 불가능한것은 얼른 접어버리는 나는 그게 참 장점이기도 하고 또 단점이기도 하다.  Zaragoza는 사라고사주의 주도로  Ebro 강가에 위치한 상업, 군사의 요충지이다.  AD시대로 들어가기전부터 로마의 군단기지로 쓰이다 많은 퇴역장병들이 주저않으면서 세워진 그래서 로마시절의 극장터도 있고 많은 유적들이 있다.  

서로마 멸망후 5세기경 Goth 족이 들어오면서  스페인은 시작되고  AD 540년경 Toledo 를 수도로 지정하였다.    714년 아랍이 들어온 이래 곧 대부분의 스페인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고 이곳은 북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지배한 main 도시이기도 하다  이슬람종교 토인비히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종교는 이슬람교라고 했던 - AD 570년 태어난 세상의 부조리에 고민하던 모하멧이 세운 종교, 평등과 적선, 궁휼, 기도 그리고 전통적인 윤리관을 교리로 삼은,  아마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논리만으로도  그렇게 로마가 200년이나 걸려 정벌했던 스페인을 2년만에 정복할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구시가지 에브로강을 따라 대성당이 있고, 옆으로 길게 늘어진 거리 그 거리엔 어느 중년 여인이  violin 을 연주하고 있었고 우린 그 앞 restaurant 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그 오래된거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린 모두 여기저기 shop 들을 구경하면 아주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여유럽게 중세의 도시를 걸어다닐수 있다니 점점 나는 이 여행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사라고사의 Basilica 는 오랜 역사와 전설을 갖고 있다. 성야곱 (St. James) 이 예수님 사후 이곳에서 전도를  하고 지나다 어느날 그는 에브로강가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성모님이 알현하셔서 기둥을 내리셨다.  성야곱은 작은 교회를 지어 성모님께 올렸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자리에 로마네스크, 고딕 그리고 이슬람양식이 섞인 바로크 스타일이 첨가되면서 1800년말 완성이 되었다.   내가 마드리드에서 가 보고 싶었던 고야의 판티온같이 그 성당의 천장에는 그의 프레스코가 있었다.  The Queen of MartyrsAdoration of the name of God 나는 그의 페인팅을 이곳에서 볼수 있는게 너무 기뻤다.  아주 예전 Chicago 에서 그의 특별 전시회를 본적이 있으나  그가 집안에 그려 놓았던 black painting 은 해외로 내보내지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스페인이 사랑하고 아끼는 고야 - 그는 출세지향적이기도 했지만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그래도 해학적으로 카르로스 4세의 왕족들을 마치 벼락부자가 된 잡화상인 일가같이 그려놓고, 또 궁정의 음모, 교회에 부패등 사회에 대한 저항수단으로  집 벽면에는 하늘이 무너저 내려 가는것 같은, 공포스러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는 너무나 그의 그림들을 사랑한다. 언제 또 마드리드에 그의 그림, 벨라스케즈의 시녀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러 갈가?  

그 성당은 스페인 내전때 3개의 포탄이 떨어졌지만, 단 하나도 성당내에서는 터지지않았다. 지금도 성당안에 두개의 포탄이 전시되어있는것을 보면서 나는 신의 경지에는 아무도 도전할수 없다는 것 무한한 경외심을 느끼지않을수가 없었다.

Zaragoza에서 Aljaferia 궁전을 간다고 했을때 나는 사실 궁금했다.  우선 국가재정복운동 (reconquista) 을 일찍 시작한 북쪽에서 그런 아랍의 성이 남아있다니하고.  그 알하페리아 궁전은 웅장했다.  성벽을 쌓아 적을 감시하는게 아마도 목적으로 시작했겠지만,  970년부터 시작한 성채로 11세기의 아랍의 왕조 Banu Hud 때 이루어진  마치 Alhambra 왕궁같이 서서이 아랍의 왕조들이 쇠잔해가고 있을때 왜 그렇게 성을 쌓고 궁전을 건축했을가?  

그후 12세기 아라곤의 왕 알폰소 1세에 의해 정복되고 아라곤왕궁이 되어가면서 많은 아랍의 건축양식과 실내장식들이 바뀌어버린것은 안타깝지않을수 없다. 우리가 들어갔던 그 궁전의 여기저기서 조금씩 남아있는  정교한 무늬의 문은 마치 고도바를 연상시키고, 팔각의 기하학적무늬, 정교한 아바레스크  문양, 여러색을 금과 함께 넣은 화려한무늬의 벽들 그 이스람 특유의 정교한 모양의 문을 통해서 나는 밖을 내다보면서 자꾸 알함브라의 궁전생각으로 가슴이 저려왔다. 독특했던 이스람의 정원도 좀 바뀌었지만 이게 어쩌면 이스람과 스페인의 복합된 문화가 아닐가 싶기도 하다. 


        III.     Pamplona

밤새 천둥을 치고 우리는 잠 못이루었는데 이제 아침엔 밝은 푸른 하늘이 보인다.  차도 옆에는 개나리가 가득 피어있고 우리는 피레네 산맥 서쪽 구릉지에 있는 팜플로나로 가고 있다.  스페인의 개나리는 우리 개나리와 달라 봄에 일찍 피는게 아니라 요즘에도 피어있었다.  꽃이 떨어지고나서 그 가지는 빗자루로 만들어 쓴다니 정말 이 노란꽃은 개떡같은 나리꽃인가, 저렇게 예쁜데 개떡같다니.  그래도 난 추박사가 얘기한 개떡같은 나리꽃이 여행내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않았다. 

이곳 태생인 유명한 작곡가 Pablo de Sarasate, 지고이네르 바이젠 나는 루마니아를 다녀온후 그 집시들이 살던 동네를 잊을수가 없다.  집시들은 왜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살아야 할가?  집시의 애환이 담겨있는 이 바이올린곡을 듣노라면 달구지에 식구들을 싣고 다니던 그 허룸하던 동네생각이 머리속에 떠오르면서 마음이 아파온다.  그런데 왜 집시하면 플라밍고 댄스가 떠오를가? 사실은 스페인 남쪽 안다루시아지방에서 시작한 춤 가끔 집시가 연상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마 정열적인, 강렬한 춤때문일가?  아주 예전 나는 Madrid 에서 그 플라밍고 댄스를 보았다.  그 유명한 댄서는 할머니의 뒤, 대를 이어 춤을 추던 아주 아름다운 17-8세의 소녀였다.  웃음을 흩날리면서 온몸으로 매력을 발산하던 그애를 보면서 나는 좀 슬펐다. 함께 간 미국여행객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했더니 그런 감각이 없는것을 보고 어린 나이로 무용수로 나선 그앨 보는게 서글픈것은 나의 편견인가 아니면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일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 빨간 쟈켓을 넣었다.  그건 순전이 팜플로나에서 입을 요랑으로 13세기부터 시작된년 7월초 San Femin 축제때의 소몰이 흰옷에 붉은 스카프를 매고 달리는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 팜플프로나는 로마의 유명한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건설되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서고트와 이스람의 정복하에 있었으나 일찌기 824년 세워진 나바라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였다. 그후 1513년 스페인 왕국에 복속되고 나바라의 주도가 되면서, Santiago de compostela 로 가는 순례길의 지나는길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오며 과거의 번영했던 고도를 말해주듯 로마의 수도교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있다.

우리가 갔던 구시가지는 요새처럼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우리는 그 시가지를 거닐며 소들이 뛰는것을 상상했다. 그 구시가지의 골목 골목을 걸어서 걸어서 우린 바로크양식의 시청에 도착했다.   그 아름답게 꽃이 가득했던 시청의 발코니에서 시장이 이제부터 소몰이가 시작된다고 발표를 하면 산토 도밍고 사육장에서 소를 풀어서 많은 사람들이 흰옷에 빨간 스카프에, 빨간 띠를 허리에 매고 여기 구 시가지에 있는  투우장으로 소를 몰아 오는것이다.   그것은 예전 투우를 좁은 시가지를 지나 투우장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오로지 한 길만 남겨놓고 다른 길은 다 막고 소몰이꾼이 소를 몰아 오던데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그 번화한 상가가 있는 골목은 상당이 좁았다 그 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소가 뛰다니 몇년전 어느 미국 청년이 소에 받혀 쓰러졌는데  일어섰다가 소뿔에 받혀 죽었다.  여기선 그냥 그럴경우엔 그냥 죽은듯 누워있는게 상식인데  지금도 그 축제 참여를 위해 50만이나 되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여기저기 예전 요새지에서 밤을 새우며 상그리아를 마시면서 그 축제분위기를 즐긴다.    

그 시청청사앞 우리가 한가롭게 거닐었던 그곳  마치 중세에 와 있는것같은 나는 시간을 잃어 버린다.  가끔식 그 거릴 불란서쪽에서 걸어오는 순레자들이나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그 시청앞을 지난다.  길거리의 shell 모양이나 노란색의 camino 표시를 찾아서 저 사람들은 험악한 피레네 산맥을 넘었겠지 존경심으로 그들이 우러러 보인다.  그곳에서 나의 dear friend Diane 이 부탁한 post card 를 부칠려고 우표 파는곳을 찾고 있었다.  마침 젊고 아주 잘 생긴 경찰이 그 옆에 서 있길래 물어봤더니 주머니에 있는 지도, 수첩등 모든것을 꺼내서 보여 주어서 얼마나 황당했던지 

Hemingway 의 스페인에 대한 열정은 그 투우의 매력과 또 플라밍고 때문이 아니었을가?   강렬한 태양과 건조한 풍토를 보면서 느꼈을  허무함은 그를 그런 소설들을 쓰게 한것은 아닐가? 그런 모든게 그를 참전기자로 또 한동안 그곳에서 살게   만들은것은 아닐가?  헤밍웨이를 사랑하는 나는 가끔씩 그가 스페인에  그렇게 매료한 이유를 내 나름대로  찾아보기도 한다.  그날 점심때 우리는 그가 단골로 다니던 그 레스토랑엘 갔다.  그에 대한 향수인지 많은 우리 또래의 여행객들을 보면서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요즘 젊은이들은 과연 그를 알가?  우리는 그곳에서 appetizer 로 시작해 main dish, 그리고 dessert 까지   내가 먹은 salmon 요리는 아주 맛이 좋았다.  Wine 까지 겻드린 우린 앞으로의 갈길도 다 잊고 이야기에 꽃을 피었지만, 옆방의 bar 앞에 비스듬이 기대어 우릴 기다리고 있던 Hemingway 동상과 사진찍는것은 빼놓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읽어도 허무함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들 아니 한 구절에서도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지만, 왜 내겐 모든게 허무하게만 느껴질가?  아마도 그의 마지막이 너무 내 가슴에 닥아오기 때문일가?  Key West 의 그의 집이 눈에 어른거린다. 스페인에서 가져온 가구들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박제한 짐승들 늪지라 땅을 파는데 애먹어 있는 돈을 다쓰고 오로지 남은 돈이라고 부쳐두었던 수영장의 그 penny 그리고 그의 집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들

        IV.     Basque 지역 - San Sebastian, Gernika, Bilbao

산세바스찬은 바스크 지역으로 피레네 산맥을 두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에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해변 도시다.  바스크어로 Donastia로 불리는 비스케이만 연안 고급휴양지인 이곳,  바스크민족은  남부 불란서와 이 지역에 많이 살고있지만 특별이 이곳이 바스크 분리주의자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때  20,000 BC 때부터 사람이 살었던 흔적인 돌로 깍은 칼같은 유물도 나오지만, 도시로 면목을 갖춘것은 11세기경이고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전쟁을 겪였지만1600년대 에스파냐의 일원으로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고  1800 년 이름을 San Sebastian 으로 개명하였다.  그 바스크 민족이 19 세기 나폴레옹 침공때 격렬한 항전으로 온 도시가  폐허가 되버린  고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만만치않은 이 바스크지역의 자치권을 박탈해 버렸다.  그들은  Ireland 의 무장단체와 연계하면서 독립을 위해 많은 테러를 자행 하기도했지만, 몇년전 뉴스에서 그 ETA 가 휴전을 선언한것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스페인이나 불란서에 감옥에 있는 바스크인들이 많다고 한다. 자존심과 민족의식이 강한 그들은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아직도 보유하고 있고 길거리에도 스페인어와 바스크어 두가지를 병용하고 있는것을 볼수 있었다.  또한 베레모가 이 바스크지역에서 유래되었다는것은 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불란서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는 항상 배우면서 다닌다.

아름답고 고급 휴양지라 알폰소 12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인 Maria Cristina 여왕이 어린 아들을 섭정할때  국정을 여름에는 이곳에서 보곤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왕궁 여름철 궁전이 있고 귀족들, 부자들의 별장 그리고 또한 여름이 되면 외국의 외교단도 시로 이전해 휴가와 일을 함께 보고 있.

우리가 그 유명한 둥근 조개모양이라는 La Concha 해변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 아니 그 도시에 들어오면서 부터 본 고색이 찬연하고 우아한 건축으로 드덮여있는 이 도시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해변에 내렸을때 바람이 몹씨 불었다.  우리 Chicago 는 바람이 많이 불어 windy city 라고 하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해변가 앞 가로수들은 가지가 높이 올라간게 아니라 위를 마치 쌍둥 잘라버린듯하면서 그 위로 palm tree 같은 잎들이 올라가 있는것을 보면서 그게 인위적인지 아니면 바람때문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우린 그 해변을 걸어보기도 하고, 시청앞을 지나 몰려있는 가게들이나 음식점앞을 지나다니다가  어느 카페에 들어가 도넛과 커피, 코코아를 마시면서 지나간 얘기들을 나누었다.

산 세바스챤하면 떠 오르는게 하나 더 있다.  미식가들이 모이는 도시… Michelin guide 에서 선출한 세계 10 restaurant 중 스페인에 4곳이 있고 그중 3곳이 이곳에 있다니…  이곳으로 오기 얼마전 Chicago Tribune  Travel section 에서 산 세바스챤에 가면 pintxos (Basque style tapas) 를 꼭 맛보아야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핀쵸는 Bar 에 서서 간단히 즐길수 있는 한입 요리로 바케트위에 음식을 얹고 tooth pick 으로  고정시켜 놓은것으로 바스크 지방의 독특한 음식이다.   예전 왕이 몸이 안 좋아서 음식을 먹을수가 없을때 궁중 chef 가 먹기쉽게 만든 음식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 우리는 굽이 굽이 언덕을 따라 호텔을 찾아 올라가면서 정말 아름다운 집들과 빌라들을 많이 보았다.  이곳에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제도 열리고, 부자들의 별장이 많아서인지 아주 고급스러운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이 있었다.  다만 시가지와 떨어져있어서 그 밤에 시내로 내려가 핀쵸바들을 들여다 볼수 없다는게 아쉬었다.   핀쵸를 여기저기서 하나씩 먹으면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거리를 쏘다닐수 있는 젊음도 이젠 없고… 그래도 누군가는  감성은 나이들면 더 강해 진다나… 아쉬움까지 겹쳐서.

가끔씩 나는 나 자신에 모순을 느낀다.  대학때 푸로레타리아에 매력을 느꼈고 누구나 공평히 살아야한다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이면서도 그 아름다운 건물들, 대리석으로 쌓여진 고급 발코니를 가진 아파트 들을  보면서 또 나도 여기와서 좀 살아볼가하는 이율배반적인 감상에 휩싸인다.  그런 상반된 이념을 갖고 있는 날 어떻게 설명할가?  이렇게 여행을 떠나면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나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다 보니 사막지대 같던 어제와 그저께의 황량한 창밖의 풍경은 침엽수도 또 활엽수도 가득한 산천으로 변하고 가끔씩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들을 거쳐가면서 나는 자꾸 상념에 빠진다.  여긴 피레네 산맥의 한쪽일가 ? 울창한 숲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멀리 떠나고 있다.  그 옛날 Herman Hesse 를 사랑하던 그 시절, 그의 소설처럼 방랑을 떠나고 싶었던 그 시절 아니 언젠가는 보따리를 싸서 떠나리라 그의 주인공처럼 나도 떠나리라    햇볕 찬란한 숲속을 따라 걸으면서, 또 밤에는 그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때론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무 숲 속에서 잠들리라 아침이 되면 그게 언젠가 싶게 아름다운 햇살이 퍼져오고 아침이슬은 영롱한 크리스탈같이 여기저기 떨어지면서 햇빛에 반사되겠지 그 젊은이의 그 정열, 그 고독함, 그 외로움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언젠가는 그 길을 떠나본다던 나는 이제 얼마나 편안한 생활에 빠져있나…그러면서 달리는 숲이 이젠 좀 달라져 보인다.  아주 아름다운 구릉속의 예쁜 집들  우리는 이제 게르니카로 간다. 피카소의 대단한 작품의 본고장으로, 가슴이 터질둣이 그곳으로 간다는데 기쁨이 충만해지고 서글픔이 또한 교차된다. 

Gernika… 우리는 시내에 있는 게르니카 뮤지엄엘 갔다. 1937 4 26, 나치와 프랑코의 연합작전으로 시작한 그 고요한 마을에 2시간동안 엄청난 포탄을 쏟아부은… 마치 이 지구상에서 그 마을을 말살하려는 듯이.  그 곳 인구의 1/3 2,600여명을 학살하고 부상당하게 만든… 우리는 그 평화 뮤지엄의 한 작은 방에서 그 사실을 체험했다.  역사를 재조명하는것도 좋지만 나는 사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  그때 그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인데 우린 사이렌소릴 들으면서  폭격과 지긋지긋한 전쟁소릴 그걸 체험하고 있다니…  그 마을은 참 평화스러워 보였다.   7-80년전의 일들…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그래도 다시 재 건축의 길로 들어설수 있는것은 정말 대단하다.   왜 그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것도 아니고 자국의 대통령이 그랬으니…

내 마음은 또 예전으로 향한다.  어릴적 아주 몇 안되는 기억중의 하나인 6.25전쟁.  그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분명히 그러셨다.  나는 서울을 사수하리라  그리곤 서울을 떠났다.   마치 세월호의 선장처럼 어리석은 국민들은 그냥 서울에 남아서 마음으로 대통령을 도우려 했다면 그것은 치기일가?  우리집도 그런셈이다.  결국은 납북당하셨지만 정치가이신 할아버님께서 서울에 계시겠다고 그 할아버님을 만류하지 못하신 우리 아버님은 식구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지만 이미 한강다리는 끊어져 버리고 간신히 구한 배는 사람들에게 빼았겼지만 폭격에 난파되어 다 죽었고  두번째 배로 우린 한강을 벗어났다.   그때의 기억 어느 여자가 쓴 양산으로 지나간 총탄 지금도 눈앞에 희미하게 떠오르는그 일이 나의 첫 6.25 기억이다. 또 한편 생각하면 그게 나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인생을 살아가는것은 그냥 내게 주어진 운명을 따라가는거라고 하고 우린 남편은 그 운명을 헤쳐나가는게 인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살아가는데 challenge 가 없나?  아무튼  우린 이렇게 안 맞는다.  

모든 사람들은 아니 전쟁의 기억이 없더라도 다 Picasso 의 게르니카를 사랑한다. 피카소는 그림이란 집안의 장식만 하는게 아니라 전쟁의 무기도 될수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또 절망감을 주기위해 흑, 백 그리고 회색만 사용해 그린…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쓰러져 가고 있고, 죽은 아이를 품은 엄마, 여기저기 울부짓는 투우의 소들 그런가하면 등불이 멀리 위에서 불을 밝히는것을 보면서  희망을 갖게 해주기도 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Picasso 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그림은 나의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버렸다.

드디어 우린 Bilbao 에 간다.  항상 가 보고 싶던 곳… 왜 Guggenheim museum 이 그 시골 작은 마을에 있는지가 항상 궁금했던 나…  그렇게 우린 그 타운에 들어갔다.  예전에 공업도시였는데 구겐하임 뮤지엄이후 완전히 문명의 도시로 탈바꿈한 도시, 35만의 인구인곳에 지하철이 있고,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우린 지하철까지 내려가서 보았지만 별반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오늘 점심은 완전 자유이다.  허지만 우린 그 유명한 핀쵸를 먹기로 마음을 먹고 이곳 저곳 핀쵸바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제일 먼저 들른곳이 1903년부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우린 그래도 두어군데 다녀보다가 다시 그 집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바케트위에 하몽을 올린것, 상치잎에 감자, 버섯등을 볶아 올리고 다시 또띠아로 싼것, 바케트위에 채소를 볶아서 올리고 그 위 볶은 가지 그리고 그 위엔 앤초비 하나, 바케트위 계살과 야채를 소스에 버무려놓고 그위 새우를 얹은것등,  여러개의 핀쵸를 골르고 로칼 맥주를 시켰다. 다들 서서 먹고 있었지만 우린 그래도 앉아서 먹는게 좋아서 다행이 두어 테이블 있는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각자 낮서른 타운에 와서 어딜가 무얼 먹어야할지 좀 막막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재미 있었다.  Grace Kim 네는 다른곳에서 이것저것 골라먹고 다시 여기서 만나 다른 음식을 시켜서 맛을 보고 있었다.  이게 아마 핀쵸를 먹는 재미가 아닐가?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음식냄새도 맡아보면서 쇼 윈도의 음식 – 바케트 위에 얹혀진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보면서 또 먹으면서 구경다니는 재미…   그러곤 길건너에 있는 백화점 구경을 갔다.  여행을 가면 모든걸 버리고 오는거라던 어느 스님의 글이 머리에 스쳤지만, 그러면서도 난 무얼 살게 없나 두리번거린다.  우린 아무것도 사지 못했지만  Rum 한병에 1,700 유로, wine 한병에 2,700 유로하는 wine shop 에서 마치 먹지 못하는 금단의 사과처럼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그 작은 도시 Bilbao, 나는 그 도시에만 들어서면 그 대단한 뮤지엄이 보일거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린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약속된 시간에 그 Guggenheim museum 을 보러 갔다.   Frank Gehry 의 대표적인 작품인 그 미술관 마치 고대시절의 괴상하게 생긴 찬란한 은빛을 가진 고래가 파도에 휩싸여 그걸 헤쳐나가고 있는것 같았다.  사진으로 단면적으로 보는것과 실제 입체적인 조형물을 본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차이라는걸 보여주는게 아닐가...   그 건물만으로 그 조형물만으로도  우린 행복했다.  이 건물을 보러 우린 여길 오지 않았던가 시카고의  Millennium park 에 있는 Gehry concert hall 도 마다하고 여기까지 보러 왔는데  우선 스케일이 컸다.  그냥 그 앞에 앉아 햇빛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가면서 본다면  여기저기서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이 조형미술품 우리는 마치 그 고래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것같이 입장을 했다.  

철강석, 선박산업을 갖고 있던 이 빌바오는 15세기 철강산업이 쇠퇴하면서 또 ETA 의 테러로 도시의 기능이 점차 침체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이 빌바오가 몰락의 슾에서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문화사업이라고 판단한 시장이 주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구겐하임 뮤지엄을 유치했다.  유치경쟁에 성공한것은 여러 조건에 부합되기도 했지만 아마도 Solomon Guggenheim 의 조상이 이곳 Bilbao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가?   박학한 추박사한테 그 얘길 듣는 순간 나는 모든 의문이 풀리는것 같았다.  Gehry 는 하나의 건축물이 도시의 역사를 바꿀수는 없다고 했지만,  나도 이 곳이 그 뮤지엄 하나로 성공했다고 는 생각지 않는다. 그 시의 모든 시민들이 그 뮤지엄에 맞는 쾌적한 문화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 결과까지 포함해서 그야말로 삼위일체가 아닐가?                

현대미술 특히 20세기 후반부터의 미국과 유럽의 개념미술, 팝 아트, 추상표현주의 작품과 에스파냐의 현대미술을 전시하고 있지만, 항상 전시물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마침 그때 요꼬 오노의 특별 전시회가 있었다.  사실 나는 현대 또 전위작가들을 이해할만한 안목이 없는것 같다. 그들의 작품이 말로 표현하지않고 하나의 행위를 보여주는거라고 하지만 그리고 본대로 느끼라니?  나는 요꼬가 무얼 보여줄려고 그랬을가 궁금한 마음도 들면서 차라리 그 시간에  여기 전시되어있다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나 보러갔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얼마전 이곳에서 사진작가 배병우의 작품전이 열렸다고 한다.  스페인의 초대로 알함브라 궁전을 폐관한 후 며칠을 관람하고 찍었다는 그의 사진전을  얼마나 좋았을가 언젠가 내가 서울 갔을때 친구들이 데려갔던 그의 고향인 남해가 주제였던 그의 전시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나는 아직도 그 작품들 생각이 난다.

이제 우리는 초 현대 작품들을 보고Bilbao를 떠난다.  비는 간간이 뿌리고 우리들은 아름다운 구릉들을 지나면서 그 속에 묻혀있는 집들을 보면서 Leon 으로 향하고 있다. 중세의 도시 마치 time machine 을 타고 가는것 같지 않을가?   

V.     Medival cities  - Leon, Oviedo, Lugo

우리가 갈 중세의 도시들  중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중학교때 세계사 시간에 들은 암흑의 시대다.  왜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한 마듸로 규정했을가?   중세는 대략 서로마제국의 멸망부터 르네상스시작까지 그러니까 5세기 부터 15세기의 1,000년을 말한다.  3천년의 역사를  뒤로 돌리고 인간의 삶은 공허하고 암울하고  단지 고대, 근대 두 문명의 중간에 끼어든 공백시대라고도 표현하지만  그 시기 중세는 인간의 존엄성이 종교에 의해 철저이 배제된 시대이다. 예술이나 문화, 철학, 인문학등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을 종교와 결탁하여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코자했던 기존세력 - 교회와 왕권 그렇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던 그 시대에 마녀사냥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종교재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으나 독일에서 가장 심하게 혹독하게 재판을 치루었다.

종교가 사악한것에서 인간을 지켜준다는 미명아래, 전염병이나 화재, 홍수등 그런 모든것을 마녀의 짓으로 돌려버리고 응징했다.  세상이 살벌하니 마술도 흥행하긴 했으나 한번 마녀로 몰리면 재판을 받게되고 혹독한 고문끝에 마녀자백을 받아내었다.  그러면 물에 넣어봐서 물에 가라 앉아도 마녀, 헤엄이라도 치면 마녀 그렇게 익사하거나 아니면 화형에 처해졌다.  마녀로 몰려 집행을 당하게 되면 그 집에서는 화형에 쓸 장작을 준비하고, 만찬 또한 대접했어야 했다.  그리곤 전 재산은 몰수되어서 밀고자, 재판관, 사제들에게 배분되었던 시절   그때 어느 사제는 하나님의 일을 왜 교부가 대신하느냐는 말 한마듸로 사형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 뿐인가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교황청에서의 면죄부 판매  그게 중세였다.

Leon BC 1세기때 고대로마 군단/히스페닉 군단 이 주둔하면서 시작된 도시이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었고  고대 레온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후 10 세기 Asturias 왕국이 이곳을 장악하면서 수도를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고 카스티유 왕국과 함께 스페인  통일의 원동력이 된 국가재정복운동  (Reconquista)  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또한 이곳은 순례자들이 향하는 Santiago 로 가는 Camino 의 중심도시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의 문화교류와 교역이 함께 이루어졌었다.  오면서 곳곳이 순례자의 길이 보이고 또 멀리서 길을 가던  순례자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가?   우리도 이렇게 medival 도시로 들어가면 이세상을 떠나볼수 있을가?       

시내에는 예전 왕궁때의 성벽들이 보이고 그런데 우리가 그 성벽안인지 밖인지 도대체 구별이 안 간다.  그러면서 조금씩 구 시가지로 우리는 간다.  El Cid의 거리를 지나서 우린 레온 대성당으로 갔다.  중세는 암울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리스 로마의 건축에 필적한것은 고딕 양식의 높은 대성당 들이었다.  작은 창문만 달린 육중한 벽대신 커다란 스테인 글래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와 내부를 환하게 비추어 주는.  우리가 갔던 레온의 Cathedral 은 그런 양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딕성당의 극치인 불란서의 랭스 대 성당에서의 영감을 받아 스페인의 건축가들에 의해 시작된 스페인 3 대 성당중 하나 - 그 성당은 원래 고대로마의 목욕탕 자리였으나 레온 왕국의 성으로 쓰다가 917년 아랍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곳에 대성당을 설립하기로 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갔을때 그 stained glass window 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 128개의 너무나 아름다운 스테인 글래스 창문들을 바라다만 보고 있었다.   그 성당은 그렇게 시작해서 14세기까지 400여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저녁은 항상 늦다.  보통 8시반이 넘어서야 시작한는 스페니시들처럼 우리도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항상 wine 과 함께 한 dinner 였다. 아주 좋은 wine 의 생산지이기도 한 이곳이어서 맛도 좋았고 우린 문을 닫을때까지 restaurant 에서 한없이 wine 을 마시면서 얘기에 꽃을 피었다.  그런데Wine 에는 4가지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첫번째 잔은 양의 피가 섞여서 사람을 elegant 하게 만들어 주고  두번째 잔은 원숭이 피가 섞여서인지 마시면 기분이 들떠서 떠들석하게 되고  세번째 잔은 사자피가 섞여서 소리를 지르면서 상대방과 싸움을 시작하고  네번째 잔은 돼지피가 섞여서인지 그걸 마시면 너무 취하다보니 토하게 되고 온갖 추태를 다 보이고   그 저녁 원숭이 피가 섞인 wine 을 마신 나는 호텔방으로 들어와 밖을 내다보니 그 레온 대성당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내 앞에 펄쳐 있었다  그밤 나는 그 앞에 다시 가고 싶었다.   그냥 다시 가서 그 성당을 바라다 보고만 싶었다  bed 에 누워서도 그 성당을 잊을수가 없어서 한참 뒤척이다가 다시 일어나보니 성당의 불이 꺼져있었다.  이젠 잘수 있겠구나  Adios Cathedral de Leon  

또 하나의 중세도시 Oviedo, 그곳에 자리 잡았던 Asturias 왕국으로 간다.  그 가는 길의 산 꼭대기에는 눈이 쌓여있고  구름은 산 허리에서 놀고 있다.  신이 내린 자연이랄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는 Grieg 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면서 산맥을 타고 간다.  내 마음속은 그 아름다웠던 놀웨이에 있던 Bergen 의 집이 상기된다.  이어서 들려오는 한국노래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참 오랫만이다. 그 예전 어렸을때 tomboy인 난 바로 아래 두 남동생들과 꽤 친했다. 두살 터울씩이니 고만고만하고 우린 여름방학때면 장충동 뒷산에 가서 하루 종일 살았다. 나비도 잡고 식물채집한다고 진기해보이는 풀들은 뿌리채 뽑아다 다듬이돌 밑에 깔아놓고 그리곤 며칠후엔 다 갖다버리고 또 시작하고 그러다 어쩔때는 너무 늦게 들어와 dictator (?) 이신 아버님 눈에 띄면 우린 다 같이 불려갔다.  그래도 정작은 나 혼자만 벌을 섰다.  어린 동생들 누나가 밤 늦게까지 데리고 다닌다고 나는 벌을 섰지만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때문에 당당했다.   아버님 방에 불려가 혼자 의기양양하게 정원에 피어있는 꽃들을 내려다 보면서 벌을 서고 있었고  어린 두 동생들은 미안해서 정원앞에서 조금 높은 그 방 창문을 통해 서있는 내 얼굴을 볼려고 깡충깡충 뛰었다.   나는 지금도 그 기억을 잊을수가 없지만,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죄스럽다. 

내 그 상념을 깨버리듯이 이번엔 뜸북 뜸북 뜸북새는 밤에만 울고 가 들린다.  난 서울에서만 살아서 뜸북새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 노랠 들으니 마음이 저려온다.  내 고향 난 서울에 가면 아니 한국에 가면 앞을 보아도 또 뒤를 돌아다보아도 굽이굽이 겹쳐서  쌓여있는 산들을 보는것만도 너무 좋다.  어쩌면 산세가 그렇게 좋은지  가끔씩 남편한테  나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런 얕으막한 산기슭에 앞에는 개울물이 흐르고 뒷산에서 나물도   캐면서 그러면서 살면 안 될가? 하고 물으면 개울에 가서 빨래 할 자신있어? 에어콘없이 살수있어?  하고 되 물으면 나는 기가 죽는다. 나 정말 washer dryer 없으면 못 사는데 한국은 여름에는 괭장히 습기찬데 빨래도 못 말리고 또 에어콘도 없이 어떻게 살지 하면서 내 마음을 접는다.  그러다보니 우린 어느새 Oviedo 에 도착한것같다.  여행은 참 목적이 뭘가?  현재와 과거, 나의 인생을 정리해보고, 고대의 역사나 건축물들, 그 사람들이 사는것을 눈으로 보고  다니고, 또 함께 여행하는 좋은 분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새로운것을 배우고 모든것을 받아들일수 있는 open mind 가 되는게 아닐가?

Oviedo 는 예전 이슬람이 AD 710년경에 스페인에 들어왔을때 많은 귀족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서고트왕국의 장군인 펠라요가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고 이 산악지대에 웅거하였다.  장군과 귀족 세력이 모여 720 년에 아스트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이 오비에도를 중심으로 왕궁을 건축하고 근처에는 성당과 빌딩들을 건축했지만  고트건축양식보다는  로만 스타일에 중점을 두었다.   이 왕국은 그렇게 이슬람에 굴복하지않고 200여년을 이어나간 이베리아에서는 이슬람이 지배하지 못한 지역으로   10 세기에 Leon 으로 수도를 옮겨 레온 왕국 을 이룬다.    Oviedo 는 예전 이베리아에 들어온 로마네스크 이전의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많이 있었으나 이슬람과의 전쟁중 많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9세기에 지은 pre-Romanesque 양식의 Santa Maria de Naranco 성당등 여러 건축물이 현존하고 있다. 나는 마치 중세에 온것같은 그 Oviedo 도시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한편 이곳에 온것도 운명적인가 싶기도 하다.  아직 10년은 채 안되었지만 외과의사였던 Dr. Oviedo 한테서 나는 cancer 수술을 받았다.  그후 곧 은퇴하셨지만 지금도 우리 남편과 나는 그를 만났던것은 행운이였다고 생각한다.  외과의사하면 생각나는 또 한 사람, 라빅 개선문에 나오던 유태인이라 여기저기 피해다니다  파리에서 의사로 일하던  어느날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버린 나는 그 옛날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8세기때부터 시작한 도시라 중세의 냄새가 무럭무럭나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그때 중세의 건물들을 보면서 제일 먼저 그  Cathedral 광장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몇시간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먼저 간곳은 화장실 - 마치 초기 수세식 변소같은 seat 이 없고 위에 있는 탱크에 달려있는 줄을 당겨야 물이 내려오는 - 그리곤 그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에 있던 조각 커다란 여행 가방과 우산을 앞에 두고 정장에 모자까지 쓰고 서 있던 남자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  우리는 그옆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갔던  Cathedral - 8세기에 기초를 시작했던 성당으로 아직도 9세기의 건물이 남아 있는 그곳은 몇세기 후 다시 12세기때부터 계속해서 복원, 확장하고 고치기를 16세기까지 했다. 나는 스페인 갈때마다 느끼지만, 그렇게 몇백년씩 성당을 건축하는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저력을 느낀다.  그 대성당도 몇백년을 건축하면서 고딕으로 시작해서 로마네스크, 바로크의 양식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 성당 안에 들어갔을때 분위기가 아주 고풍스럽고 장중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레온 성당의 stained glass window들은 장미와 식물들을 넣어서 아주 화사하고 또 한편 모던해보이기도 했지만, 이곳은 고풍스럽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것은 아마 좀 짙은색,  성인들과 갑옷을 입은 기사같은 모형을 많이 넣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대성당을 보고 우린 박물관 견학도 했다. 오래동안 catholic 을 지켜온 이곳이라 그런지 그 박물관에는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많이 있었다.  십자가  예수님  성모님  교황이나 사제의 화사한 금실로 수놓은 옷들 성인들의 모습, 조각들  옛날 악보들  그런데 무엇보다 감동적인것은 희미한 옅은색의 혈흔이 묻어있는 하얀 옷감이 들어있는 액자 꽤 큰 액자였다.  그 옛날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머리를 감싸던 하얀 옷감이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던지   작은 도시의 성당 박물관에서 그렇게 고귀한 또 많은 전시물이 있다는게 참 놀랍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내 견해이긴 하지만 나는 화려하게 보석으로 치장한 십자가를 볼때 무언가 마음이 편치않다. 십자가하면 우선 떠오르는게 예수님이 지고 가시던, 그리고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골고다의 십자가인데 이것도 나의 편견일가?

우리가 Cathedral 을 나섰을때 조금씩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구시가지를 걸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restaurant 에는 Dali Gala 사진, Grace Kelly Rainier 공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정말 그들이 여길 왔었을가?   궁금한 마음도 생겼다.  점심엔  appetizer bean soup 그리고 곁드려 순대, 소세지, 돼지고기가 따로 나왔다.  점심인데 너무 heavy 한게 아닐가 싶기도 했지만 그리곤 main dish bake 한 생선에 노란 소스를 얹은 그리고 감자.  여기서도 어김없이 우린 wine 을 마셨지만 또 extra 로 사과주가 나와서 우리 남편은 두가질 믹스해서 cocktail 을 만들었는데 나도 try 해 보았지만 부드럽고 샴페인같은 맛도 나고        

이제 우린  Santiago 로 가기 마지막 순례자의 도시로 간다.  Lugo  예전 로마시절엔  군대 주둔지였던 이곳 그러나 이 성벽은 3세기때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기위해 세운 현재 유럽에서는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있는 Roman wall 이다.   높이 10-15 m, 길이 2.2 km 의 총 71개의 탑이 설치되어 있고 10개의 문을 갖고 있다.  3세기때는 참 고대 로마가 어려운 때였는데 어떻게 이 이베리아 그곳도 서쪽의 끝인 Lugo 지방에 성벽을 쌓았을가?   그 성벽을 걸으면서 내 마음은 마치 time machine 을 타고 찬란했던 로마시대의 2,000 년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때 이곳을 점령하고 그리고 몇세기를 속국으로 갖고 있던 고대 로마제국 에스퍄냐 태생의 로마의 현제라고 불리우는 두 황제 생각도 나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영토확장에 힘썼던 트라야누스와 그 일생을 로마가 통치하고 있는 전선을 시찰하던 하드리아누스 얼마나 지도자로서 책무를 다하기위하여 자기네 일생을 바쳤나 

이 곳이 familiar 하게 느껴지는것은 나도 어쩌면 그 옛날에 이곳에 살지는 않았을가?   그 옛날 어쩌면 나는 이베리아인이었을지도 어딘가에는 내가 살던 집이 있고 마치 나 자신은 잠간 나들이하느라  이 성벽을 지나가는것처럼  그 오랜 세월 나는 몇번이나 이 세상에 태어났었을가?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  페루에서 만난 너무 낮 익은 어느 소녀. 또 작년에 갔던 사라예보, 그 타운 또 이번 Lugo 에서의 고대 로마의 성벽 내가 꼭 예전에 다녀 갔었던것 같이 느껴진다   내 인생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가?   나는 불교는 철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환생을 믿는다.   우리 인간이 살다가 어려운것은 불교의 말대로 전생의 빚을 갚느라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얼마전 Francis교황이 무신론자에게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맞게 살면 된다고 하셨는데  나는 정말 그 분을 존경한다.  혹 그 분은 옛날 새와도 얘기하셨던  Assisi 의 성인 St. Francis 가 다시 태어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우리가 갔었던 Leon, Oviedo 와 마찬가지로 이Lugo 12세기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인Cathedral 도 순례자들이 거쳐가면서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곳이기도 하다. 순례자의 길 1000년부터 시작한 그 길 중세의 왕이나 영주들이 순례자를 위하여 길을 닦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던 그 Camino 의 길을 이제 우리도 함께 한다.    

VI.   Santiago de Compostela

우리가 이 북스페인 여행을 여기까지 오면서 날씨에 참 운이 좋았다.  두어번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모자에 코트자락을 여미고 다녔지만, 간간이 밤에 폭풍이 오고 천둥소리들 듣던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Lugo 에서 떠나면서 하늘은 파랗고 흰 뭉게구름이 떠 다니고 우리는 버스 멀리로 순례자들이 걸어가는것을 보면서 우선 Santiago 에 도착했다.  중세의 문화, 종교의 도시 - 그 산티아고, 모든 순례자들의 중세때부터의 로망 이 순례자의 길, Camino 10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야곱 (St. James) 은 이베리아반도, 특별이 이 Galicia 지역에서 전도를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순교한다.  그 제자들이 돌로 만들어진 배로 유해를 지브롤타를 지나 생전 그가 전도하던 이곳에 운반하여 비로서 영면에 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9세기초 이베리아 북서쪽에서 어느 은둔수도사가 하늘의 별을 따라 이동하다가 그의 무덤을 발견하게되고  전 유롭에 알려지면서 교황의 인증을 받게 된다.  Santiago de Compostela 는 스페인어로 야곱 (Santiago) 이 있는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 (Compostela) 이라는 뜻으로 유해가 발견된 그 자리에  Asturias 왕인 알폰소 2세가 교회당을 세우도록 하고 또한 순교자의 길을 닦기도 했다.  원래 그 지역은 로마인들이 만든 묘지였는데  성당이  건설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그 시절 상황으로 이슬람 지배하에서 힘들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인들로 시작하여  불란서에서는  피레네산맥을 넘으면서 또한  북유럽, 동유럽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례로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산티아고로 오기 시작했다.  그때 국가재정복운동 (Reconquista) 으로 많은 지원이 필요한 이베리아 왕국들은 순례를 위한 길을 정비하고 잘곳을 만들기도 하고 여기 저기 병원이 생기고 또한 카스티유의 이사벨여왕도  병원을 그 St. James 성당옆에 건축해서 순례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10세기말에는 이슬람 국가인 알 안달스가 산티아고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이슬람과 전쟁을 하던 그 시절 국가 재정복운동이 활발하던 그 시절 성야곱은 흰말을 타고 달려와 이슬람을 쳐 부순 성인으로 부각되면서 그 전쟁을 성전이라는것을 부각시키면서 드디어 1492,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알함브라궁전을 가진 Nasrid 왕국을 패망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장 번성했던 12세기에는 연간 순례자가 50만명이었으며  성야곱 성당은 바티칸, 예루살렘에 이어 3대 성지로 알려져있다.   15세기가 되면서 이슬람을 축출한 이베리아  반도에선 Reconquista 가 종료되고  종교적 열정도 식어지면서,  또한  독일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순례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17세기까지 순례가 계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관심이 고조되어 종교적 이유뿐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러 또는 치유하러 이길을 걷는다.           

제일 먼저 들어갔던 Santiago 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Camino 를 끝내고 들어오는 문이었다.  어느 French 가 혼자서 들어오길래 며칠동안 걸었느냐고 물었더니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41일째라고 한다. 나는 그곳에 잠간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묵묵히 마지막 성야곱 Cathedral 로 가는 문으로 들어온다.  상념에 잠겨있는 이사람들 새로 태어난, 새 인생을 살아갈것같은 이 사람들 Cathedral에서 미사를 드리고  야곱의 손을 만지면서 기도를 드리곤 북서부 대서양 바닷가에 가서 한달 넘게 함께한 신발을 태워 버리고 떠난다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기인 여행을 했을가?  아마 그중에 카톨릭신자로서 신과 함께 대화를 하고 싶어서 떠난 사람도 있겠고 또 어쩌면 자기 자신을 찾기위하여 떠난 사람들도 있지 않을가?  살다보면 가슴이 막혀올수도 있고 어딘가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우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그럴땐 이런 묵상을 할수있는 Camino de Santiago 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수도 있겠지  예전에는 불란서를 넘어 산티아고로 향했기 때문에 여러개의 route 이 있지만, 가장 popular 한 불란서의  생쟝 피데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800 km 의 길은 정말 한번 도전해 볼만도 한데  또한 Camino 의길은 별들의 길이라고도 한다 찬란한 은하수길이 땅위의 까미노와 평행성이기 때문데

은하수 하면 나는 가슴이 뛴다.  어렸을적 별들을  보면서 걷던 그 옛날들 살면서 느끼지만 어렸을땐 아무것도 모르고 무모했으니까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땐 우린 은하수를 보면 견우와 직녀 생각을 하고  달속에는 떡방아찌는 토끼가 있고 얘들아 나와라 달따러 가자 노래처럼 우린 산을 넘어가면 감히 달을 딸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St. James Cathedral - 처음 유해가 발견된 곳엔 작은 교회당을,  9세기말경에 알폰소 3세가 pre-Romanesque양식으로 건축했지만, 현재의 대성당은 1075년시작해서 여러번 증축하여, 고딕, 바로크의 양식을 골로루 갖추고 있지만 내부는 중세의 분위기가 많은 아주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12세기말의 아름다운 조각의 영광의 문은 지금도 순례자들이 들어오면서 만지며 기도를 드린다. 우리도그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성당을 돌고 야곱의 손을 만지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독교인인 Mrs. 윤이 야곱의 교리는 믿음에는 항상 행위가 따라야한다고  내겐 믿음이 있나 내겐 아무 행위도 믿음도 없는 삶인데 이렇게 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내세의  삶을  예견해야하나?   그 손에 내손과 마음을 담으면서 내가 오로지 할수 있던 말은 용서해주세요  밖엔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 광장 가운데에 널부러져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오는 순례자들을 바라보면서 또 방금 wedding 을 끝낸 젊은신혼 부부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축복을 보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그들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길 앞엔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가진 St. James Cathedral 이 있고 그 옆으론  중세의 맛을 볼수있게 꾸며논 5성급의 호텔은 예전 이사벨라여왕이 순례자를 위해 만든 병원이었고  대성당 건너편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옛 궁전이 있고 그냥 그 광장에 앉아있기만 해도 좋을것 같았다.  그렇게 앉아있다 또 shopping 도 좀 하고   까미노를 떠나기 전 우린 그 작은 골목길에 있는 restaurant 에서 아주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오랫만에 먹는 크로케는 옛날 학생때를  연상시키고 조갯살이 겻드린 파스타를 먹으면서 우리 모두는 길을 처음 떠나는 사람들처럼 들떠있었다.

그 옛날 10세기부터 시작한 유럽의  많은 순례자들은 넓은 모자와 사도의 옷을 입고 조개껍질을 등짐에 달고 지팡이를 짚고 그렇게 산티아고를 향해 떠났다.  순례자들은 그 조개껍질을 달고 다니면 성야곱이 그들을 순례 길에서 지켜줄거라고 확신했는데 그 유래는 그 옛날 야곱의 유해를 이곳에 가져올때 거의 스페인 북쪽의 해안지에 도착할 무렵 갑자기 폭풍이 그 배로 휘몰아치면서 그의 유해가 떠내려 갔다.  그 얼마후 조개껍질이 가득 씌어진 아무  상처도 입지않은채 야곱의 유해가 해안가로 떠밀려왔다는 전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순례자들이 고향을 떠날땐 어쩌면 다시 못 돌아올  길일수도 있으므로 거대한 환송식을 치러주고 그 들은 고행의 길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특히 13세기 십자군 전쟁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막혀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로 모이기도 하였다.  중세 각 지역의 왕이나 영주들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또한 치료해주고 그 까미노의 길 유럽 전역에서 오는 이 순례자들의 길은 서로 과학, 의학, 철학등  지식을 서로 전해주면서 그 중세에 문화를 풍요하게 또 교류를 촉진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다.

   우리는 Camino 의 길을 LaVacolla 에서 시작했다.   13 km 의 까미노 평균 40일을 넘어서 무거운 짐을 메고 떠나는 사람들.  침대가 주욱 늘어져 있는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그곳에서 취사도 하고 빨래도 해서 backpack 뒤에 늘어뜨리고 다니는 사람들.  까미노의 길을 조개껍질이나 노란 화살표로 표시한것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씁슬하기도 했다.  남들이 40일이 넘게 걸어오는 길을 13 km 만 걷는 나 자신이 너무 slick 한것 같기도 하고 이건 사치가 아닐가? 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다.  우리는 얕으막한 아름다운 구릉도 걸어가고 냄새나는 소 외양간도 지나가고  크고 작은 집들을 지나쳐간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Buenos Camino 하면서 사람들이 지나친다.   우리도 역시 대답한다.  부에노스 까미노 간혹 길거리에 사인들이 보인다.  호텔이나 알베르게를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거리에는 꽃들이 우릴 쳐다보고 키가 아주 홀쭉하게 큰 나무들도 우릴 반겨준다. 간혹 상수리나무도 보이고 그 아래 도토리 껍질이 잔뜩 남겨져있다 겨울내내 다람쥐들이 이 도토리들을 까 먹었겠지 하고 우린 또 지난다. 

마음속에 참 여러가지 상념이 지나친다.  그 중세에 1,000년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가 그땐 길도 제대로 닦여있지않고 잠자리는 또 얼마나 불편했을가?  그러다가 그 중세때를 다시 생각해 본다  암흑의 시대 종교가 인간을 압박하던, 그래도 12세기엔 대학이 생기고 인문학이 조금씩 발달되던 -  성전이라고 내세우던 십자군 전쟁 그리고 유명한 아베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너무나 오래 잊고 있던 그들의 사랑   내가  대학 다닐때 그들의 사랑의 편지가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 들의 사랑의 시초는 육체적 탐닉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아베라르가 결혼 신청을 했을때 엘로이즈는 거절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남 몰래 결혼을 했지만, 남성으로서 거세를 당한 아베라르는 수도원에서 수업을 하면서 가르치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에 들어가 살면서  그렇게 헤어진 그들은 오로지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중세의 사상과 사랑을 나눈 이야기들 가슴이 아파오도록 사랑의 얘기가 절절하던.

또 그러다 보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생각이 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거부한 그 알리사  결국은 좁은문으로 둘이는 갈수가 없기에  나는 그 좁은 문을 고등학교 다닐때 처음 읽었다  그냥 읽어야할 classic이었으니까   그땐 그렇게 감동적이라고 생각지않았었는데  언젠가 기억에는 잘 없지만, 20년쯤 전일가?  서울 갔다 들른 책방에서 우연이 그 책이 눈에 띄었다.  그날밤 나는 예전 어렸을때처럼 밤을 새면서 그 책을 읽었다  그토록 감명 깊을수가 있을가?  과연 내가 어렸을때 읽은 책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었나..  하는 비애감이 가져질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삶이 인생의 가장 큰 공부라는것을  왜 예전에는 몰랐을가?         

한참을 걷다 우린 잠시 휴식처에서 시간을 가졌다.  !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둥실둥실 떠있고 그리고 때론 구름이 끼어서 더운줄도 추운줄도 모르게 그냥 우린 잘 걸을수 있었다.  그 곳에서 먹던 아이스크림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 여기저기서 오랜 길을 떠난 사람들이 한가하게 늦은 점심을 먹고 있고 그러면서 우린 떠났다.  한참을 가다보니 순례자를 위한 조각이 있는 마치 공원같은 곳에 다다랐다.  그 조각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달려있는데 가운데 우리가 오면서 보아오던 조개껍질의 빗살모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4면에는 교황을 비롯해 돌을 파내어 그림을 그려놓았고 사람들이 그 앞에 돌을 가득 쌓아놓았다.  나도 돌을 하나 올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곳에 공원을 만들어 놓은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이제 곧 성야곱의 Cathedral 에 도착한다는것은 알려주는 것같았다.

얕으막한 구릉을 지나면서,  이제  흙길을 벗어나 들어선 시내의 풍경이 낮설기도 하고 아스팔트 길도 낮설게 느껴지고   거의 Cathedral 가까이 가는데 그곳엔 여러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조각들이 보인다.  오랜 세월을 순례자와 함께 쌓아온 역사가 그대로 느껴지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린 일찌기 우리가 쳐다보고 서있던 St. James Cathedral 로 가는 문으로 들어왔다.

어디에서 오던지간에 100 km 를 걸으면 순례자의 증서를 준대지만 사실 그런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또 우리가 까미노에서 만난 서울의 어느 성당의 교인들은 벌써 몇번을 그리고 이번엔 20여일에 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그런게 뭐 그리 대단하랴  우리 마음가짐이 중요한게 아닐가?   그 길을 걸으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고,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자신에  솔직해 질수 있다면  그리고 현재의 나 자신을 내려놓고  나아가야할 삶의 길을 찾아 본다면 그것처럼 값진것은 없지 않을가  우리의 El Camino de Santiago

VII.   Salamanca

아름다운 대학도시  Salamanca, 그곳으로 간다는데 마음이 부풀어온다.  허지만 여기 Santiago 에서는 400 km, 파란 하늘에 뭉개구름이 가득한 오늘, 한나절은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살라망카는 스페인 최초로 1218년 레온왕국의 알폰소 9세가  학교를 설립했지만 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여러 전문분야의 교육을 하는 대학이 된것은 1255년으로 유럽 최초이다.  또한 유럽 처음으로 알폰소 9세는 11세기에  민주적인 의회정치를 시작했다. 

그 예전 스페인에서는 빵가격이 동일했다고 한다.  물론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귀족들은 그 안에 하몽을 넣고 샌드위치 만들었겠고 서민들은 빵에 뭐 야채같은거나 넣고 먹었을가?   허긴 요즘엔 그게 더 웰빙이라고 인기가 좋겠지  그래서 세상은 돌고 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멀리서 Camino 의 길을 따라서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그 순례자들은 Santiago 로 향해서 북쪽으로 가겠지 남쪽으로 내려가니 다시 개나리꽃이 가득하다.  하이웨이 양쪽에 가득 핀 개나리꽃들 왜 이곳에 있는 얘네들은 계절을 덜 탈가?  또 이렇게 한없이 흔하게 피어서 개떡같은 나리꽃 소릴 듣나?   여긴 그렇다고 치고  우리 한국에선  그렇게 상큼하게 계절을 시작해 주고 또 상큼하게  꽃잎이 져 버리는데도 개떡같은 나리꽃이라고 부르나 아니야   난 그냥 개나리꽃이라고 부를거야    또 가끔씩 무성한 숲들도 지나가고 그 푸른 산천에 개나리꽃은 color 를 더해준다.  거기에 한가지 더 노란색이 더해진다.  아주 작은 daisy   어쩌면 자연은 이렇게 조화를 이룰가?  우리가 그림을 그리면 어떨땐 그 흔한 노란색으로 그림을 망쳐보릴수도 있지만, 자연이 이룬 색감은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수가 없다. 

서서히 비가 유리창에 뿌리기 시작한다. 스페인은 highway가 잘 되어있어서 비가 와도 바닥에서 튀지가 않는다.  산지가 완만하게 변하면서 멀리 보이는 산들은 한국같이 아기자기하진않지만  둥그스럼한 능선속에서 가끔씩 옛 영주의 성들이 보인다.  또 한참 가다보면 멀리 해가 산위로 비치고 또 듬성듬성 보이는 마을의 집들로 비치는데 마치 유토피아 같이 보인다.  더 내려가다보니 이젠 나무도 없고 붉은 황토가 펼처져있다.  마치 북아프리카같은  토양이 석회성분이 많아 도자기를 굽기에 좋은 곳이긴 하지만  이런 곳은 그냥 방치해두면 사막이 되기 쉬운 곳이라고 한다. 

갈길이 먼 우리는 하이웨이를 빠져 좀 지름길로 달린다.  그 마을에서는  예전 로마시대 은과 올리브를 많이 로마로 가져갔다고 한다.  또 지나다보면 소들을 키우는 목장이 보인다.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투우 원래 투우는 난폭한 소의 종류로 농경에 쓸수가 없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래는 Felipe 2세때 Ronda 에 있는 첨기병 기병학교에서 실전을 방불케하는 소를 피하면서 계속 공격하는 모의전투를 훈련하던 방식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Ronda 에서 전투훈련을 하던 기사가 쓰러져 소가 마악 기사를 공격을 할 찰나에 한 마을 청년이 뛰어들어 모자를 벗어 흔드니  그 순간 소는 그 청년을 향해 달리고, 기사는 도망가고  소는 다시 목동의 모자를 향해 덥치고, 목동은 도망가고  1726 Francisco Romero 가 그 장면을 보고 시작한게  현재 투우의 역사가 되었으며 그 집안은 4 대째까지 투우사로 활약했는데 6,700 마리의 소를 죽였다고 한다.  그때 이사벨 2세가 선물한 에메랄드가 가득 달린 망또의 이야기는 가히 전설적이라고  한다.  스페인의 모든 청년에겐, 특히 가난한 청년들에게  투우사가 되는게 꿈이다  투우사가 되면  그야말로 술과 장미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투우사를 배출하는 투우학교는 4년제인데 첫 1년은 투우사의 자세를 갖추기위해 훌라밍고를 배운다.  그래서인지 훌라밍고 댄서나 투우사의 하늘을 보고 도도하게 인사하는 스타일이 같기도 하다.  예전엔 그 죽은 소는 투우가 끝나면 어려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지만, 현세는 각박해져서 그런지 

우리가 들어온 그 도시는 정말 아름다웠다.    온 도시의 건물들이 이곳에서 생산하는 베이지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져 아주 고풍스럽고 역시 오래된 대학의 도시같은 분위기였다.  그 옛날 로마시대의 도시로 700년대 이슬람에 정복 당하기도 했으나 그 후 이곳은 기독교인과 모슬렘족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11세기 이슬람의 수도였던 Toledo 를 알폰소 6세가 탈환한 이후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이 다시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허지만 이 살라망카시가  새 전기를 맞은것은 대학을 이곳에 처음으로 시작한 13세기 초반부터다.  스페인뿐아니라 유럽의 유수한 대학으로 알려져있고 지금도 외국학생을 비롯해 3만여명의 학생들이 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  이곳 대학출신으로는  최근 ABC 방송국에서 World News anchor woman Diane Sawyer 를 대신할 anchor man David Muir 가 있다.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저녁 뉴스의 Diane 은 더이상 책상에 앉아있기보다는 special reporter 로 일하기를 원해서 떠난다니 나는 참 그런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현재 안정된 직장이나 생활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흠모한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1980년대 많은 professional career 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job 을 버리고 멀리들 자기 자신을 찾아서 정말 삶을 가꾸어보겠다고 자연으로 떠났으나 나중에 들으니 한 5년안에 모두 도시로 돌아왔다  나도 그때 우리 남편보고 보따리를 싸서 resort area 에 가서 나는 restaurant 에서 waitress 로 일하고 생선냄새도 싫어하는 우리 남편에게는 고기 잡으면서 fisherman 으로 살자고 했다.  결국 그렇게 끝나버렸지만       

우리가 처음 찾아간곳이 마요르광장 그 광장은 1729년 건축하기 시작한 바로크양식으로  가운데 시청을 중심으로 gift shop, ice-cream shop, restaurant, 약국등이 있어서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스페인에서는 크고 또 아름다운 건축양식으로  알려져있는 광장으로, 요즘은 관광객들이 더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 광장은 원래 펠리페 5세가 투우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축한것으로 19세기 중반까지 투우장으로 쓰이다가 현재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그 광장엔 마침 military 기념행사가 있어  많은 시민들이 준비에 한창이었고  우린 그 아름다운 광장에서 eye shopping 도 하고 그러다가  대학이 있는 쪽에 있는  왼쪽문으로 빠져나와 조개껍질을 400여개정도 앞의 정면에 가득 박아논 맨션으로 갔다.   조개껍질하면 생각나는 성야곱과 순례길 안내를 위해서 길거리에 새겨놓은 조가비  16세기에 지은 Santiago 기사의 집으로 집안내에서도  많은 조개껍질을 사용해 햇빛에 따라 명암이 바뀌도록 해 놓은  살라망카의 한 관광의 명소이다        

Salamanca 대학은 참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대학은 13세기 초에 이루어졌으나 16세기에 건축된 대학 입구 정면엔 정교한 돌로 된 아름다운 조각들이 가득한데 가운데는 재정적 지원을 많이 한  Isabella 여왕과 Ferdinand 의 조각이 있고 그 위 잘 보이지않을 정도로 작게 해골과 함께 개구리가  조각돼 있었다.  그 해골은 15세기말 20살도 채못돼 죽은 왕자 Juan 을 기리기위한,  개구리는 그를 치료한 의사의 별명이랜다. 그렇게해서  개구리가 상징이 된 그 곳은 gift shop 에도 개구리 모형이 가득했고  살라망카 대학에서는 그 조각된 개구리를 찾지 못하면 졸업을 못한대나? 그리고 관광객들에게는 good luck 이라는 얘기가 있다.  관찰력이 부족한 나는 그 개구리가 잘 보이지않아 옆에 있는 마라토너 정란씨가 손으로 포인트 해주었다. 그래서 간신히 행운을 잡게 된 셈인데 

나는 살라망카 대학 생각하면 우리가 바르세르나 에서 콜롬버스 동상을 보았을때 그 대학에서 콜럼버스가  교수들과 토론을 하던 돌로 조각한 그림 생각이 난다.  콜럼버스는 Isabella 여왕과 Ferdinand 왕을 Alhambra 궁전에서 만나서 인도를 찾아 나서겠다고 했을때 이사벨 여왕은 콜롬버스를 이곳에 보내 살라망카 대학교수들, 사제들과 토론을 하게하던  결국 이해를 못 구했지만,  여왕은 콜럼버스의 손을 들어주어 대단한 환송식과 함께 세비야에서 떠나게 해 준다. 

스페인은 우리같이 졸업식날 졸업장을 받는것과 달리 대학을 졸업하면 한2년이 되야 졸업장이 집으로 배달된다고 한다.  그 졸업장에는  총장, 수상, 국왕이 친필로 서명을 하는데 국왕은 하루에 30장씩밖에 서명할수없기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니  뉴스에 그 국왕 Juan Carlos 가 은퇴하고 Prince Felipe  국왕으로 즉위한다고  한다.  나는 예전 마드리드에 갔을때 국왕이 그 대단한 왕궁은 손님 접견이나 만찬, 파티에만 사용하고 사는 집은 마드리드 접경에 있는 그냥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같은 곳에 산다고 들었다.  참 감동적인 얘기였는데, 재작년인가 이렇게 경제가 어려울때 국왕이 사치스러운 아프리카 여행을 했다고 국민들이 불평한다는 얘길 들으면서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있으면 이렇게 되는건가 하는 씁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새로운 국왕 Felipe VI 의 시작이니, 앞으로 스페인 앞날에 영광이 가득하기를

Salamanca cathedral 나는 한번도 한 도시에 두 대성당이 있다는 얘길 들어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곳은 12세기에 카스티유왕  페르디난드 5세가 건축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리고 그 옆으로 이어져서 15세기부터 220년동안 건설된 고딕과 로마네스크, 바로크의 양식이 통합된 두번째의 대성당이 건축되었으며  제단은 함께 겸용하고 있다.  대주교께서는 두군데를 번갈아 다니시면서 미사를 보신다는 이 성당엔 우리가 갔을때 마침 결혼식이 있었다.  대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다는것은 사실 누구나 할수 있다고는 하나 사실은 귀족이나 donation 을 많이 하는 사람들만 할수 있다고 한다.  그 날도 우린 신부가 차에서 내리는것부터 또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밖에 가득 서 있는것을 보았는데 모두 아주 부유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하객중 기모노를 입은 아주 아름다운 일본 여인이 있던게 특이했다.                                            

이 성당은 정문앞 여러 동물들, 개구리, 원숭이, 사자들을 조각해 놓았는데1992년 복원을 하면서  20세기의 심볼로 astronaut 을 조각해 놓았다.  우리가  예전에 밤을 새고 TV를 본  Armstrong 이 달나라에 갔었을때 입은  그 우주복을 입은    개인적인 이유지만 나는 Armstrong 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간 달 표면이 그렇게 삭막하다니  어렸을때 나는 밤에 그 달을 쳐다 보면서 우리가 할머니한테서 들은 마치 토끼가 떡방아를 찌는 것같다는 상상속에서 살았었는데. 그는  나의  그 아름다운 꿈을 부셔버렸다.  -   그리고 또 하나 복원할때 넣은 털이 많은 원숭이같은 괴물이 아이스크림을 먹는것  그것은 학생들을 상징한댄다.

많은 관광객들도 여길오면 우리와 같이 그 조각들을을 찾는다       

Frog Astronaut Ice-cream을 먹는 Gargoyle



          VIII. Segovia

우리 여행의 마지막 여정 Segovia.  그곳은 내가 항상 또 가보고 싶은 도시, 또 항상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Roman Aqueduct 이 있는, 이제 우린 그곳으로 간다.

가면서 여기저기 빨간 양귀비가 보인다허지만 작년 4월 우리가 발칸을 갔을때만큼 천지가 빨갛지가 않다. 아마도 6월이라 조금 계절이 늦어서일가봄부터 이른 여름까지 핀다고 하던데. 그 Amapola, 우리도 잘 아는 그 노래-아마포오올라 하는 구절이 떠 오른다. 우리가 한없이 보던 그 빨간꽃이 노래와 믹스되면서 내가 갑자기 어디 있나, 어쩌면 그 빨갛게 물든 들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일명 집시꽃이라고도 부르는 , 마치 집시들이 어디로 정착할지 아무도 모르듯이 이 아마폴라도 바람결에 따라 흐트러지는 꽃씨는 그 다음해에 어디서 피어날지 모른다는데  집시, 가슴을 저리도록 해주는 민족 그 옛날 인도에서 이쪽으로 넘어왔다고도 하고. 내 마음이 항상 집시한테 가는것은 왜 그럴가?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집시의 일원으로 태어났었나  집시때문에 가슴이 아픈것처럼 나도 이젠 아마폴라만 보아도 가슴이 아플것 같다그런데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그 안에 생채시계가 있어서 여름이 지나면서 다음해 꽃을 피울 준비작업을 한다지만 이렇게 아마폴라같이 일년생꽃들은 언제 꽃피울 작업을 할가아마도 봄이 되어 푸른 잎들이 나오면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할가

고도, 세고비아는 로마전 켈틱이 자리잡았던 곳이다그러다 로마가 지배하던 이곳에   수도교를 세우고 그러다 서로마의 멸망후 이슬람이 정복하기도 했지만 한동안은 잊혀진 도시였다레온-카스티유왕국의 알폰소 6세가 Toledo 를 재탈환하면서 이 도시도 기독교인들이 다시 모이면서 직물업과 양모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과 유럽에 수출을 하고 중세에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나 그후 15세기이후엔 해양산업이 발달한 세비아가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0 , Walt Disney group에서 Cinderella 성의 모델을 찾기위해 전 유럽을 다니다 찾은 이 세고비아의 Alcazar 그 유서깊은 역사가 있는 Alcazar 로 갔다우리는 중세같은 이 고도의 돌이 깔린 좁은 언덕길을 한참 올라서 그 성내로 들어갔다그 정원에서 올려다보는 알카사르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정말 아름다운 디즈니의 성이었다그렇게 그냥 바라다만 보아도 좋은, 더구나 스페인의 역사가 이루어진  그 성안에 들어간다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찼다우선 돌로 된 성채인 그 곳은 정말 천연의 요새였다한쪽은 깍아지른 절벽의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그 바위위에 우뚝 세워진 성은 정말 난공불락의 요새다원래 Roman 들이 쌓은 요새에 다시 아랍의 요새로 쓰이다가 12세기경 시작해 레온-카스티유 왕국이 재건축한 성이다그 이후 한동안 왕궁으로 쓰이면서 여러 왕들 시대에 증축하면서 첨탑도 세우고 그렇게 아름다운 성이 되었지만  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속 사실은 이 세고비아에서 Isabella 왕녀가 비밀리 Aragon 의 왕자인 Ferdinand 와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1474 년 레온-카스티유 왕국의 여왕으로 선서한 곳이기도 하다.

Queen Isabella 는 얼마나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는가, 나는 가끔식 Isabella 가 그렇게 강인하게 된것은 어쩌면 자란 배경이 아닐가 싶다그 옛날 어머니인 Isabel 은 폴투갈 왕녀로 그 Sintra 에 있는  궁전 천장에 백조 27 마리가 그려져있을 정도로 애틋한 사랑을 받으면서 27마리의 백조와 함께 이미 아들이 있는 카스티유왕에게 시집을 왔다. 그 어머니 이사벨은 정성을 들여 제 아이들도  제쳐놓고  그  step son 을 왕위에 올려 놓았지만 ,  Henry 4세는  즉위후 새어머니와 두동생들 Isabella Alfonso 를 변방으로 축출했다. 그 곳에서 힘든 생활을 하던 어머니는 미쳐버리고, 왕은 다시 왕궁으로 두 남매를 데려갔다오빠인 왕, Henry 4세는 어린 Isabella 를 나이많은 폴투갈 왕에게 결혼시키려고 하지만,  이사벨라는 이 세고비아의 성을 본거지로 삼고 이웃 나라 아라곤 왕자 Ferdinand에게 청혼을 하고  비밀리에  Santa Maria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다 Henry 4세가 죽자 레온-카스티유의 여왕으로 이 알카사르에서 즉위하고  왕위 정통전쟁을 벌인다그때 남편인 Ferdinand 가 병력을 몰고 와 힘겹던 싸움을 치루던 Isabella 가 전쟁에서 이기고 명실공히 레온-카스티유 왕국의 여왕이 된다.  

그후 Queen Isabella 는 군사제도을 개혁하여 영주들의 병사를 왕에게로 계승시키면서  Loyola 가문이 반기를 들어 나중 Jesuits (예수회) 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세원을 영주에서 왕실로 옮겨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는데 이 제도는 불란서의 루이 14세때보다도  200년이 앞선 조세제도 개혁이다스페인 역사의 대단원인  1492년에는 Granada 에 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Nasrid 의 알함브라왕궁을 접수하고 국가재정복의 막을 내리면서 에스파냐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켰다. 또한  Columbus 를 세비야에서 인도를 찾으러 떠나보내 본격적인 해양시대를 열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로마제국 다음으로 스페인제국의 초석을 쌓았다

정문앞에서 우리는  이곳 안내인 Anna 와 인사를 했다. 우리 남편이 예쁜 Anna 를 보자 Muy linda, Anna 하자 얼굴이 금새 환해졌다옆에서 듣던 추박사가 이제 작업의 시작이네요  그래서 우릴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다. 여자는 예쁘다고 하면 기분이 좋은것은,   그리고 남자들은 우리 남편을 비롯하여 예쁜 여자만 보면 해바라기가 되고.

      

알카사르성 정면의 벽은  동그란 문양의 장식인 이스람 양식이 엿보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앞엔 양쪽이 깍아지른 절벽사이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우리가 들어올수 있게 내려와 있었다그 예전  유사시엔 다리를 올렸놓아서 아무도 들어올수가 없었는데   그 거리가 얼마쯤일가? 아무도 뛰어 들어갈수 없을뿐아니라  날쌘 말도 한걸음에 뛰어 넘을수 없는 거리라던데    그렇게 들어간 그 안, 제일 먼저 간곳은   갑옷과 무기를 전시한 방 그옆엔 어린아이들의 갑옷도 있었는데, 왕족이나 귀족들은 어려서부터 갑옷을 입히고 말을 타는걸 배웠겠지 싶으면서도 얼마나 아이들이 무거웠을가 싶다또 예전 가구들 그리고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이 마치 앉아 있는것 같은 the Throne Room  그리고  아름다운 문양의 천정들은 알함브라궁을 연상시키고, 그리고 에스파냐 왕들의 조각, 이사벨라 여왕 즉위식, 전쟁등의 많은 그림들과 tapestry 등 중세의 스페인을 연상시켰다. 그 알카사르에서 페르페 2세의 결혼식도 이루어지고 여러 세대를 거쳐 왕들의 궁전으로 쓰여졌으나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 이후는 감옥으로도  사용도 하고 1862년 화재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많이 복원되어서 현재는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다.

      

그 알카사르왕궁을 떠나서 우린 대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그 광장엔 마침 일요일이라  밴드가 동원되고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고 어린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른들과 댄스를 하고 있었다우리도 비인 벤치에 앉아 그들의 축제를 바라보고 그 아이들이 노는 정겨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대성당은 예전 이사벨라여왕이 결혼한 Santa Maria 성당자리인데  유럽 르네상스시대에 마지막 고딕성당으로 알려져있다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한참이었다나는 그 Cathedral에 들어가 여기저기 구경을 하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중세 이슬람이 정복하면 제일 먼저 성당부터 부셔버렸기때문에 그것에 대항해 더 열심히 많은 성당을 지었지만, 한편 가난한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도 했다는 사실은 루즈벨트대통령보다 더 일찍 뉴딜정책을 편셈이다. 그리고 화려한 성당 내부 예전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가 많은 시절, 대량의 금과 은을 그곳에서 가져왔지만 한편 얼마나 그 식민지국가에서는 착취를 당했나

우리가 점심 식사를 한곳은  바로 그 로마의 수도교 앞이었다내가 앉은곳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서있는 그 대단한 수도교. 나는 점심을 먹었는지, 그 수도교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날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레스토랑 화장실에는 수도물이 흐르는게 마치 수도교같이 한단 내려서 물을 흐를수 있도록 해서 손을 씻으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갔다그리고 마음은 자꾸 옛날로 돌아간다 내겐 옛날부터 은퇴하면 하고싶은 꿈이 있었다. 아름다운 resort area 에서 inn을 열고 아침과 저녁을 serve 하면서 여행객들과 이런 저런 여행얘기를 하면서 살수있다면 하는것,  그래서 항상 여행을 다니면서  장소를 생각해 보는데  페루의 우루밤바, 크로아티아의 드브로브닉, 그리고 여기 세고비아는 어떨가?  

점심을 먹고 나오니 앞엔 aqueduct 이 서있고 레스토랑 옆엔 테이블을 길게 펴놓고 음식을 날르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있다. 이렇게 일요일엔 아버지들이 가족에게 봉사하는 날이라 교회가 끝나면 남자들은 음식을 만들면서 온가족이, 동네사람들이 모여 먹으면서 즐긴다고 한다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인생의 value 를 가족에 두는 스페인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소박하고 빈부의 차도 별반 크지가 않다고 한다그동안 금융위기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갖고 있고 실업률이 20 %가 넘지만  GDP $36.000 인 이 나라   스페인에서  유학하는 어느 학생이 한국에서는 불금(불타는 금요일) 이라고 금요일 저녁에 춤추러 가고 놀자고 했더니스페인 학생들은 고개를 저으면서 금요일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간다고 했다는 얘길 들었지만, 정말 나는 스페인을 알수록  더 스페인을 사랑하게 된다.       

     

Roman Aqueduct - 1세기후반에 완성된 로마인의 작품그 앞에 있는 길을 따라 망루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한없이 서서 그걸 지켜보고 싶다  내가 얼마나 또 오고 싶어 했나그땐 제왕이 누구였을가도미티아누스왕 (AD 81-96) 때일거라고도 하고 그 수도교를 만든 사람의 이름과 연대도 세월이 지나면서 다 떨어져나가고  이 속국 이베리아의 작은 도시 세고비아에 수도를 놓아준 로마인의 관대함  저산 높은곳에서 끌어와 28.5 m 의 높이로 순전히 화강암으로만  아무 접착제도 없이, 아무 모터도 없이  지탱되는 이 수도교 높이가 0.5cm 정도씩 낮아지면서 물이 흘러갈수 있도록 하고 이 기인 수도교를 만들었대니 어떤 과학적인 수치로 어떻게 돌이 하나도 움직이지않게 2,000 년을 버틸수 있었을가그 세월동안 폴투갈의 대지진에 여기서도 많은 피해를 입었대지만 아직까지 견고한  그 수도교는 19세기 중반까지 이 세고비아에 물을 공급했으니 상상이나 될수있는 일인가 

  또 중세에서는 악마의 다리라고 했다니그 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어느 어린 소녀가 항상 물을 길으면서 그랬다, 이 지긋지긋한 물길이,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물깃는 것을 벗어날수 있을가? 매일 그러면서 물을 길었는데 어느날 밤 꿈에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꿈속에서 그러길 아가야, 넌 물 깃는걸 벗어날수 있단다. 네가 물 깃는걸 안 하게 해줄수 있지. 그런데 한가지 약속이 있단다. 네가 나에게 네 영혼을 주는거지, 그러니까 네 영혼과 바꾸는거란다. 그럴수있니?  그 어린아이는 너무나 지긋지긋한 물길이를 안해도 된다니 너무 솔깃해서 그러자고 꿈속에서 약속을 했다. 그랬더니 내가 사흘후 그 약속을 너하고 지키마하고 사라졌다. 그리곤 그 날 아침부터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집앞에 돌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면서 수도교는 조금씩 만들어지고 그런만큼 그애의 고민은 점점 깊어갔다마지막날, 드디어 성당을 찾아 성모님께 얘기했다. 성모님 제가 큰 죄를 지었어요 하고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성모님은 다 들으시고  알았다 너무 걱정하지마라 하시며 그 애를 돌려보냈다집에 돌아온 그애는 밤잠을 못자고 괴로워하다가 어느덧 잠이 들고 악마의 일은 거의 끝나가고.    마지막 돌을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닭이 울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울은 닭때문에 일을 채 못 끝내고, 아이의 영혼도 못 갖고, 그 악마는 성모님을 원망하면서 돌아가야만했다중세에서는 그 대단한 수도교를 인간이 건설했다는것조차 믿을수조차 없어 그런 악마의 다리라는 이름까지 붙였으니 얼마나 그땐 몽매했나..

한참을 그 거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녔지만, 나는 그 앞을 떠날수가 없었다그 길건너 한쪽엔 로마 건국의 신화 - 버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이야기 -   여기 aqueduct 옆에 있는 그 조각을 보면서 또 보면서 나는 로마를 다시 생각하고.  

      

이제 우리의 여행의 막바지 아쉬움이 가득하다우린 내일 아침 집으로 돌아간다.  Madrid 시내에 들어 온 우리는 우릴 기다리고 있던 동키호테와 산초를 에스파냐 광장에서 만났다. 내가 항상 연민을 갖고 있던 동키호테, 철없을땐 무모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었지만, 나일 먹으면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면 아마도 세상은 더 순수하고 더 맑아지는게 아닌가 싶어 내 얄팍한 마음가짐이 부끄러웠었는데.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엔 관광객이 넘쳐나고, 도대체 우린 이번 여행에 몇개의 마요르 광장엘 갔었나?   우린 건너편에 있는  San Miguel market 에 갔다.  그 마켓은 원래 재래시장으로 내가 아주 예전에 갔을때도 있었었는데 언제적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시장의 개념을 지나 손님들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신선한 스페인의 직석요리도 시식하는 새로운 형태의 마켓이었다우리 일행도 그곳에서 신선한 굴도 시식해보고 상그리아도 한잔씩 마셔보았다.  과일도 또 어찌나 싱싱하고 신선하던지 

그렇게 구가지를 헤메고 다니던 우리는 예전 Hemingway가 즐겨갔던 1725년에 문을 연restaurant, Botin 앞에서 들여다도 보기도 했다이층엔 그가 앉았던 자리도 있다던데.  그곳의 메인 메뉴는 코치니요 -  2주된 통 돼지구이 참 그 메뉴는 Segovia 에서도 대표적인 요리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그 골목안 근처의 어느 레스토랑은 앞에 여기는 헤밍웨이가 오지 않았다는 패말이 붙어 있어서 유명해 졌다고 한다 우리도 올려다 보고 킥킥웃고  이제 우린 마지막 디너를 Tapas, 그 여러 접시에 나오는 타파스를  와인과 곁들어 먹으면서 과거에서 이제 서서히 돌아올 시간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헤어진다는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거겠지,  여행은 참 감성을 자극한다.    이 북스페인 여행이 주는  역사와 문화, 자연에 어울려서 지낸, 고대에서 현재까지의 새로운 세계를 가슴에 담아보던 우리의 여정 동시에 우리 인생을 재조명해주는것 같고 우리가 아직도 젊고 여행할수 있다는 자신감도 넣어준다이제 나는 가슴을 펴고 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할 꿈을 그려본다. 

Adios, Espana